“이 상을 혜주 너 혼자서 다 차렸단 말이야?” 마치 요리 책의 ‘손님상 차리기’ 코너를 옮겨놓은 듯한 혜주의 상차림에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아직 네가 시집을 갔다는 것조차 실감이 안 나는데...” 그녀는 엄마 치마 자락을 졸졸 따라 다니는 혜주의 세 살배기 딸을 눈앞에 보면서도 혜주가 아기엄마라는 사실이 영 믿어지지 않았다.
“숙모, 이 도미찜 좀 드세요. 오늘 아침 수산시장에 가서 싱싱한 걸 사온 거예요.” “어머, 네가 어떻게 이런 걸 다 만졌어? 너 고등학교 때까지 멸치대가리도 무서워 못 다듬었잖아. 멸치 얼굴이 자꾸만 자기를 쳐다본다고...”
비록 7명의 시댁조카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유독 혜주에게만 정이 갔다. 개인전 때문에 보름쯤 미리 나와있던 남편조차 그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초청을 받았다. 혜주의 간청에 결국 그들 부부는 그날 밤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1년을 넘게 만나면서도 그녀는 도무지 지금의 남편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평소 그림을 좋아하던 그녀가 길을 지나다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 처음 남편을 만났다. 그때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그룹전을 하고 있었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그녀의 뒤를 그가 무조건 따라왔다.
그는 전형적인 게으른 예술가였다. 어느 날 그는 경복궁으로 그녀를 불러내더니 경회루 연못 앞에 그녀를 세워놓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잔뜩 불어터진 그녀를 웃긴답시고 연못가를 깡충거리던 남편이 한순간 연못 쪽으로 기울었다. 재빨리 팔을 잡아준 그녀 덕분에 그는 온몸이 풍덩 빠지는 수난은 면했지만 한쪽 발이 연못에 흠뻑 젖었다.
그날 남편은 젖은 양말을 핑계로 경복궁에서 가까운 큰형 집으로 그녀를 불쑥 데려갔다. 당황한 그의 형수가 부엌에 들어간 사이 다섯 살 난 혜주가 수줍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래, 저렇게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 번 쳐다보며 가볍게 살지 뭐. 요렇게 예쁜 딸 낳고 말이야.” 이윽고 그녀의 찬란한 고생길이 환하게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숙모, 결혼한 후로는 숙모 얼굴이 자꾸만 못쓰게 변했어요. 물론 술과 그림밖에는 모르는 숙부 때문이라는 걸 저도 잘 알죠. 그런데도 왜 그런지 자꾸만 숙모한테 역정이 났어요. 숙부가 끝내 무명인 게 마치 숙모 탓이라도 되는양 말이에요.”
“미안하구나. 나이 어린 조카한테 어른다운 모습은 보이지 못하고...” 그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혜주의 결혼사진으로 얼른 눈길을 떨궜다. 그러자 혜주가 앨범을 넘겨 맨 뒷장을 펼쳤다. 거기에 미화 100달러 짜리 세 장이 나란히 끼워져 있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제가 대학교 때 한 달간 미국 숙모 집에 가 있었잖아요. 한국으로 떠나오는 날 숙모가 가게 카운터에서 제게 건네주신 거예요. 공항에 직접 못 데려다 줘 미안해 하시면서.”
“그래, 그날 참 속상하더라. 네 숙부가 새삼 원망스럽고...” “아니에요. 그날 그 300 달러 뿌리치느라 오랜만에 잡아본 숙모의 손이 너무 거칠었어요. 그 까칠한 감촉 때문이지, 아니면 철없던 내 자신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아무튼지 비행기에서 내내 울고 왔어요.”
“그 돈은 필요한 데 쓸것이지 뭐 하려고 이제껏 앨범에 끼어놓았어.” “저도 살다보면 샛별아빠랑 힘들 때가 있지 않겠어요? 그때 숙모 떠올리며 참아보려고요. 참, 숙모 그거 아세요? 이번 첫 개인전의 주인공은 작은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숙모라는 것.” 혜주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혜주의 얼굴 위로 그 옛날 빨강 원피스 계집아이의 모습이 살짝 포개졌다.
강진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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