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장기려 박사가 1995년 12월 25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지 올해로 10주기를 맞이했다. 평생 가난하고 힘든 환자를 돌보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장박사. 그는 숱한 일화를 남기며 북에 두고온 아내와의 재회를 끝내 이루지 못한채 10년전 아쉽게도 별세했던 것이다.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1911~1995)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내최초로 간암환자의 간절제술을 집도한 외과의. 부산에 복음병원(현 고신의료원)을 창립하고 보험제도가 없던 시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국내 의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의료봉사자이다.
나는 1960년 부산 중학 재학시절 장기려 박사를 처음 만났다. 부친 김봉오박사(평의의전)는 그와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같이 근무한 동료의사였고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한국의 세브란스로 유학하여 의사의 꿈을 키웠고, 방학때마다 장박사가 근무하던 부산 복음병원을 찾아 많은 조언과 가르침을 받았다.
장기려 박사는 의사로서의 꿈을 키우던 내게 정신적 멘토로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내가 의대를 졸업하고 약혼을 하게 되었을 때, 장박사는 약혼을 직접 주관하며 크게 기뻐해주었다. 특히 약혼녀가 경성의대 당시 수재자였던 노춘택 박사(전 부산 기독병원장)의 장녀였던 관계로 더욱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리라.
나는 장기려박사로부터 2가지의 각별한 선물을 받고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과 찬송가가 같이 묶여있는 성경책이다. 장박사는 성경책 안에 손수 ”사랑과 평화를 사회에 전하소서. 아버지와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소서“라는 글을 써주셨다. 다른 하나는 장박사께서 친필 붓글씨로 쓴 시편 23편 액자이다. 나는 지금도 매일 출근하기에 앞서 액자 앞에서 시편23편을 읽은 뒤 집을 나선다.
이런 장기려 박사에게 나는 한 가지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1992년 가족들과 함께 고국을 방문했을때 장박사는 중풍으로 불편한 몸이었지만 청십자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그때 “이제 자네가 맡아서 하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할 수 없어서 거절했던 것이다.
1995년 평통자문위원으로 귀국했을 때 부산에 계신 장박사는 침대에 누워 거동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이북을 방문하여 사모님과 자녀들을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여쭙자 “많은 이산가족들이 있는데 나만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다.
이날 헤어지면서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을 남기고 3개월 후 그해 크리스마스날 장박사는 삶을 마쳤다. 나는 세브란스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개업의로 진료하면서 의료보험이 없어서 병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 무료봉사를 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하게 된 배경에는 멘토인 장기려 박사의 영향력이 컸다. 벌써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되는 고인을 추억하며 부족하나마 후학을 통해 이 땅에 숭고한 고인의 뜻이 끊이지 않게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김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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