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타는 호남 農心
쌀 팔아 복구비 마련하려 해도 수매제 폐지로 쌀값 떨어져
더 이상 따뜻한 남녘 땅이 아니었다. ‘설마(雪魔)’가 할퀴고 간 호남은 백색 대재앙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농민들의 신음소리가 넘쳐 났다. 농민들에게는 내년 3월로 닥친 외국산 쌀의 국내소매시장 유통과 올해 쌀수매제 폐지에 이은 또 하나의 재앙이었다.
복구작업이 시작된 22일 오후 전남 함평군 해보면 폭설 피해현장은 처참했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비닐하우스 축사 집들은 눈 속에 묻혀 알아볼 수조차 없었고, 농로와 논밭에 서있던 전봇대는 거대한 눈 기둥으로 변했다. 복구작업을 위해 눈밭을 헤치며 마을로 들어가는 전경들의 모습이 흡사 ‘남극횡단’에 나선 탐험대의 행렬처럼 보였다. 마을 곳곳에는 주민들은 넋을 잃고 주저 앉아 있었다.
전남 나주시 나주평야 일대로 들어서자 폭설로 애지중지하던 모든 것을 잃고만 농민들이 보였다. 산포면 송림리 풋고추 재배농민 강병남(50)씨는 무너진 비닐하우스(10개동) 사이로 허리까지 차오른 눈을 치우다 말고 연신 한숨만 토해냈다. “외국산 쌀의 소매시장 유통이 얼마 남지 않았고 쌀수매제 폐지로 쌀값이 곤두박질해 살기가 팍팍한 판에 눈까지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구먼”이라며 혀를 찼다. 그는 하루에도 12번씩 죽음을 생각한다.
그는 이번 눈으로 풋고추 농사를 다 망쳐버렸다. 피해금액은 8,000여만원. 풋고추를 팔아 연말에 올해 쌀농사에서 생긴 농협 부채(5,000만원)를 갚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는 복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창고에 있던 햅쌀 60가마(가마당 40㎏)를 내다 팔려고 했지만 현 시세대로라면 원가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팔 수가 없었다. 수매철이 지나면 쌀값이 조금을 오르기 때문에 이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일단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10가마만 팔아보기로 했다.
산포면 덕례마을 입구 한 식당에 주민 7명과 함께 낮술을 마시던 황일준(42)씨는 “폭설로 애호박 비닐하우스 15개동이 모두 무너져 1억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며 “울화통이 터져 점심 때부터 소주 한잔 걸치고 있지만 복구비 만들 생각만 하면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는다”고 목청을 높였다. 황씨는 “나라에서 돈을 좀 준다는데 그게 언제일지 모르고, 또 과거 각종 수재 등 때도 실제 돈 받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며 “나라가 농민 살릴 생각은 안하고 죽일 생각만 하는 것 같다”고 까맣게 타버린 가슴을 쳤다.
역시 눈 폭탄을 맞았던 전북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복분자 집단 시설하우스 단지인 고창군 아산면 성산리 성기마을의 김병선(50)씨는 무너져 내린 비닐하우스들이 꽁꽁 얼어붙어 복구작업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우리 마을의 피해액만도 50억원에 이른다”면서 “자식처럼 키운 복분자가 죽어가는데도 멍하니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어 속만 숯덩이처럼 타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번 폭설은 외국산 쌀의 소매시장 유통과 쌀수매제 폐지로 궁지에 몰린 농민들이 농사포기를 결정하는 계기로도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연말 농협 대출상환 기일이 닥치면서 빚을 갚을 방법이 없거나 운영비가 없어 궁지에 몰린 농민이 야반도주하거나 경작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할 것이라는 것이다.
전주=최수학 기자 shchoi@hk.co.kr
광주= 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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