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형란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냐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오래 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이 해인님의 ‘풀꽃의 노래’)
추석 날 가족 선산으로 성묘 가는 길 들판에는 코스모스와 들국화 같은 가을 들꽃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기에 작은 추억도, 사랑의 기억들도 나에게 남겨져 있지 않은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때문에 지루해지면, 나와 동생들 사촌들은 작은 언덕과 들판을 뛰어 다니면서 밤나무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벌어진 밤송이를 꺼내기도 하고, 들꽃이나 억새풀들을 꺽어 꽃다발을 만들어 집으로 한아름 안고 오고는 했었다.
심심하다며 그만 가자고 우리들이 조르면, 손으로 묏등의 잔디를 몇번씩 쓰다듬고 아쉬워하며 일어서던 모습이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요즘 자꾸 눈에 밟히는 이유는, 아마도 생의 유한성을 내가 알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였던 초록 풀숲에 피어 있는 작고 애잔한 들꽃들에 언제부터인지 눈길이 가고 마음을 빼앗겨서, 멀리 떠나거나 갯바람이라도 쐬러 가까운 바닷가로 향하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눈은 풀꽃들을 찾고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이름 모르는 많은 들꽃들이 그 모양과 향기에 꼭 어울리는 예쁜 이름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누구 하나 시선 주지 않는 허허로운 들녘이나 외진 바닷가 절벽에 피어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존재들, 아무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 주지 않고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에게도 고운 이름이 있기에 서운하지 않다고...푸름에 물든 삶이라서 그저 기쁘기만 하다고... 드센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흔들리는 억새풀과 야생화에게서는 겸허한 순응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온다. 그래서 피고 지는 이름모를 들풀처럼 그렇게 조용히 이 땅에 살다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잊혀진 슬픔과 맑게 살았던 삶의 기쁨들이, 그들의 나즈막한 노래가락이 나는 자꾸만 듣고 싶어진다.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 작은 씨앗으로 영글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초월함이, 잊혀지는 것도 두렵지 않는 풀꽃들의 온전한 자유로움이 나는 부러워진다.
살아가면서 때때로 마주하게 되는 지독한 그리움과 허무, 퍼붓다가 언젠가는 그치는 눈처럼 지나가버릴 사랑들과 그로 인한 외로움, 그리고 예기치 않던 만남과 이별마저도… 잠시 피었다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풀꽃처럼 모든 것들이 기다려 주지 않고 사라지고 잊혀질 것을 이제는 잘 알기에…그 찰라의 아름다움을 붙잡아 얼마만이라도 곁에 머물게 하려고, 나는 무던히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바닷가까지 나왔으니 게나 몇 마리 사서 집에 가 살아 있을때 쪄 먹어야 맛있다고 오늘 일용할 양식을 노래하는 남편의 성화에, 나는 다시 현실 속 나의 자리로 돌아오지만…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모두 사라지는 그런 꿈이 아닐까…어느 것이 진짜일까… 자주 의문을 가지며…
외로운 골짜기에 피어도 자연의 은은한 황홀감 속에서 기뻐하는 풀꽃처럼 그렇게 나도 짧은 하루의 소박한 행복을 느끼면서…온종일 들로 산으로 바다로 차가운 바람을 안고 해질녘까지 헤매이다 석양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나의 몸에 마음에 온통 초록 풀잎물과 고운 들꽃물이 들어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