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밭에서 기른 것이 다 밥상에 오른 것은 아니다. 어떤 식물은 관상용이었다.
카틀레야 (cattleya, 열대 난초과), 안투리움(anthurium), 반다 오키드(vanda orchid)는 어머니가 맡아 기르셨다.
파나에바 정글 속에 있는 우리 밭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채소가 풍성하고 꽃들이 만발하였다.
힐로에 사는 부모님 친구들은 우리 시골집에 오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분들은 우리의 채소밭과 양계장도 재미있어 했다. 언젠가는 직업이 재단사인 집의 아들들이 카네이션을 길러서 팔고 싶다며 반 에이커 정도의 땅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 땅은 예전에 경작을 한 적이 있었지만 잡초로 꽉 덮여있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그 청년들은 멋 나는 바지에 가죽구두 같은 걸 신고 왔는데, 보니까 뙤약볕에서 신사양반들이 호미질을 하는 게 신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래도 다음날 또 와서 카네이션 씨를 심었다. 주말 카네이션농부가 될 궁리를 하고 있었나본데, 한두 번 더 나오다가 그 뒤로는 뜸해졌다.
그런데도 얼마 지나니까 정말 카네이션이 잘 커서 꽃을 피웠다. 정작 그렇게 되니까 청년들은 꽃밭을 돌보지 않았는데, 그래도 우리는 그 카네이션 향기를 즐겼다.
땅에 심은 씨가 자라나는 모습은 경이롭다. 하지만 식물재배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고 특히 그게 생업이 되면 정성을 들여야 한다.
우리 채소밭에는 늘 토마토, 가지, 아니면 고추나무들이 차고 넘치게 많이 자랐다.
여럿 되는 밭은 파나에바 정글의 온갖 덤불과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는 무엇을 하셨는지 몰라도 농경에 능하고 밭에 나가면 평화로워 보이시는 걸 보면 아마 본업이 농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제 4장 노닐던 시절
우리의 유년기는 11살에 끝났으니 매우 짧았다. 어릴 적 놀이는 조직적으로 짜여 진 게 아니었다.
어른이 옆에서 돌보거나 개입하는 적도 없었고 또한 장난감 몇 개를 놓고 게임을 하는 일도 없었다.
뭉환 오빠는 옛날 아버지가 완구점에 데리고 가서 사주신 장난감기차를 아직도 사무치게 기억한다. 오빠가 여섯 살 적이었는데, 아버지는 거기 들어가서 뭐든지 맘에 드는 걸 골라가져도 좋다고 하셨다. 오빠는 철로가 딸린 기차 세트에 마음이 끌려서 그걸 찍었다. 그건 아마도 거기서 제일 값비싼 물건이었을 게다. 그때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기차가 없는 쪽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트럭이나 색 구슬, 투창놀이 등등 다른 장난감의 장점을 보여줬다. 그런 걸 하나 고르라니까 오빠는 시종일관 기차 세트를 찍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손을 호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오빠는 장난감기차에 1달러라는 가격표가 붙어있었던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건 당시 아버지의 일당(日當)보다도 큰돈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 다 털어서라도 아들이 좋다는 완구를 사주신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이,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비록 기차는 사라졌어도 정답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영영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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