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했던가? 우리 중에서 제일 얌전했던 윤성이가 한 번 망고나무에서 떨어져서 약간 놀랜 적이 있다.
열한 살 치고는 키가 큰 뭉환 오빠가 용감하게 윤성이를 집으로 업고 갔다.
집에 거의 다 가서 오빠는 나무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 뒤로 윤성이는, 구아바만 빼고는 절대 나무에 오르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 한성이도 어린이-친화적이 아닌 구아바 나무에 올라갔다가 한 번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난 상처가 아직도 왼쪽 눈언저리에 남아있다.
나는 이따금씩 뮤지컬 촌극(寸劇)을 맡아서 공연했다. 마침 이웃집 시즈꼬는 목소리가 고왔다.
그 애가 잘 부르는 곡은 루이스야, 세인트 루이스 축제에서 만나자(Meet me in St. Louis, Louis, meet me at the fair)였다. 복성, 한성, 나 셋은 숲에서 딴 티(Ti)닢 치마를 입고 훌라춤을 추고 순이 언니는 우리 셋의 공연을 구경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훌라춤을 무척 좋아했다. 훌라는 음악과 손과 힙(hip)동작으로 우아하게 어떤 스토리를 말해주는 춤이다. 언젠가 한 번은 내 나이 여덟 살 때인데, 언니와 동생들이 나를 꾀어가지고 다다미에 앉아 저녁 담배를 태고계시는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게 했다.
나는 아버지가 지켜보시는 가운데 “Lovely Hula Hands(훌라 댄서의 어여쁜 손) 전곡을 추었다. 춤이 끝나자 아버지는 아무런 감정도, 얼굴표정도 없이 하시는 말씀이 그저 “필라우(pilau, 상스럽다)”라는 거였다. 세대 간 문화적 격차가 그렇게 컸다. 부모님은 일본식 씨름 스모를 즐기셨다.
크리스마스 전야에는 힐로 한인교회에 나갔다. 거기서 공연하는 성탄프로그램을 두 차례 보고나서는 뭔가 좀 색다른 크리스마스다운 공연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이가 열 넷이던 나는 대본과 연출을 책임지고 동생들은 모두 연기를 맡았다. 손에 석유등을 들고 무대 위를 살금살금 기어가는 해리의 연기는 히트였다.
청중은 배꼽을 잡고 교회당이 떠나갈 만큼 큰 소리로 웃어댔다. 이듬해에도 공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두 차례 더 해주고는 복성, 한성, 영흥이가 더는 못하겠노라고 했다. 아무리 딱딱한 사탕을 많이 준대도 막무가내였다.
이웃집사람들은 우리 친구였다. 뭉환 오빠와 해리의 가까운 친구들은 조니(Johnny) 아니면 “뚜뚜 맨“이라고 불리는 목축장노동자 십장 오하나(Ohana, 친척집)의 아들들이었다. 그의 아들 소니와 명환에게는 거의 4마일이나 되는 곳에 고기 잡는 자리가 있었다. 쉬프먼씨의 허락을 얻어서 가는 그곳은 바다까지 연결되는 그분의 저택을 거쳐야 했다.
뭉환 오빠는 우리의 사로(私路)가 아니면 딴 데로는 아버지의 차를 몰고 가지 않았으나 친구 소니랑 같이 쉬프먼씨 집을 거쳐 고기잡이를 하러 가는 날은 예외였다.
그런 날은 친구를 즐겁게 해주려고 일부러 액셀러레이터를 더 밟았다. 그러면 친구는 엔진이 부르릉거리는데 큰 소리로 ”야, 이 정도밖에 못 달리냐?“라면서 계속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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