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버린 모국, 그래도 가슴이 찡”
미국생활의 시작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양부모 밑에서 성장한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 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노력으로 한인 이민사에 또 다른 성공신화를 연출해 내면서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버드 피츠제럴드>
“미군복무중 뿌리의식”
미 육사 출신, 듀크대 로스쿨 JD, 육군 전투기 조종사, 연방검사… 화려한 성공 신화의 이력서를 써내려간 주인공은 온실 속의 화초 출신이 아닌 한인 입양인인 버드 피츠제럴드(52)씨다.
연방검찰 오리건주 유진시에서 부검사장으로 복무하고 있는 피츠제럴드씨는 “지금 내게 명성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는 성공지향적이었다”며 “지금 돌아보면 성숙하지 못 했다”고 말했지만 입양인 출신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쉽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그는 현재 조세 포탈과 인종혐오 범죄 등을 전담하고 있다.
피츠제럴드씨는 육사에 지원하게 된 동기에 대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무료로 배움을 이어나갈 기회는 육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쉽지 않게 얻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군 복무 중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고향인 한국에도 주한미군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한인 커뮤니티와 무관하게 살아온 피츠제럴드씨가 한국을 몸소 체험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파견되면서부터다. 그는 그 곳에서 동료 흑인 군인이 한국인을 멸시하는 모습을 보고 “내 자신이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였다”고 말해 가슴 속의 맥박은 여전히 한국을 향해 뛰고 있음을 내비쳤다.
피츠제럴드씨가 기억하는 뿌리의 파편은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와 16세 한국 어머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뿐이다. 그는 “주한미군 파견이 생모를 찾을 유일한 기회였지만 왠지 찾으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며 “아마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해 입양의 기억이 남긴 상처의 뿌리는 얕지 않음을 보여줬다.
성공대신 이제 종교에 푹 빠진 피츠제럴드씨는 홀트 아동복지회가 주최하는 입양인 모임에도 참석, 한인 입양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며 이들이 잘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도 하고 있다.
피츠제럴드씨는 출생 자료가 궁금하다며 “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면서도 “갑자기 내가 나타나 한국의 생모가 난처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았으면 바람”이라고 말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입양인의 아픔을 내보였다.
<수잔 순금 콕스>
“홀트봉사 30년 사랑의 빚 갚기”
전세계 최대 입양인 기관인 홀트 인터내셔널의 임원에 오른 첫 번째 한인 입양인. 그의 이름은 수잔 순금 콕스(55)다. 3세 때 미국으로 입양돼 미국인으로 자란 그지만 생부모가 물려준 순금이란 이름을 고집하는 그는 영락없는 한인이다.
홀트 인터내셔널의 부회장인 콕스씨는 “내게 입양인이란 배경이 없었어도 나는 홀트 인터내셔널에 몸담고 있을 것”이란 말로 입양인 단체에 대한 30년에 걸친 애정이 비단 개인사로 인해 생긴 것만이 아님을 강조했다.
입양인 출신으로 누구보다 입양인의 사정을 잘 아는 콕스씨는 입양정책을 집행하고 감독하는 정책 전문가다.
지난 달 한국 정부가 정한 입양의 날 행사를 맞아 방한한 콕스씨는 “한국 내에서 입양아를 터부시하는 문화가 조금씩 사라지고 국내 입양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면서도 반대로 국제 입양에 소극적으로 돌변한 한국 정부의 정책에 우려를 나타냈다.
콕스씨는 국제 입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전 세계 국가들이 동참한 헤이그 협정에 한국 정부가 서명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국제 입양에 대한 국가적 거부감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아기들의 권리를 뺏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콕스씨는 홀트 인터내셔널에 몸담고 있는 만큼 입양아들의 네트워킹과 한인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그는 1999년 미국에서 400여명의 입양인을 한 자리에 모아 입양인 모임을 출범시켰으며 오는 7월에는 한국에서 열리는 전 세계 입양인 모임 준비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콕스씨는 한인 커뮤니티 속의 입양인의 위치에 대해 “연방센서국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한인 10명 중 1명은 입양인 출신”이라며 “비록 입양인들이 성장한 문화적 배경은 이민 1세들과 다를지라도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그 어떤 이민 2세들 못지않다”며 입양인은 한인 커뮤니티의 한 부분이라고 밝혔다.
<케이 문스타>
“위안부 결의안 앞장”
워싱턴포스트에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HR121)의 광고를 디자인한 주인공은 한인 입양인 케이 문스타(34)씨다.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한국을 떠난 입양인지만 그는 결코 고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스타씨는 워싱턴포스트 광고를 디자인한 배경에 대해 “사실 내가 자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한인들을 만날 기회도 많지 않아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 몰랐다”면서도 “가장 친한 친구를 통해서 위안부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작은 도움이라도 보태고 싶었다”고 말했다.
7세 때 미국으로 입양된 문스타씨의 입양기는 한 편의 동화와 같다. 미혼인 델타항공 소속 스튜어디스인 어머니가 한인 승무원의 ‘땜방’ 근무를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대신 미국으로 입양될 입양아를 데리러 갔다 문스타씨를 보자마자 “내가 입양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문스타씨는 “믿기 어렵겠지만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어떤 초능력에 이끌려서 ‘저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며 “입양돼서 보니 백인 어머니가 과거 그린 그림 속의 주인공과 내가 너무 똑같았다”고 털어놓았다. 미혼으로 문스타씨를 입양한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미혼으로 남아 두 사람의 인연은 천연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그는 덧붙였다.
스스로 민감한 정서를 지녔다고 말하는 문스타씨는 “영혼의 치유를 강하게 믿는다”고 강조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스스로의 과거가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명상과 요가에 더욱 몰두하고 있다.
한국어를 잊어버린 문스타씨는 “왜 내가 한국말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느냐”고 어머니에게 따졌지만 “어머니는 ‘내가 그토록 노력했지만 네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하더라”며 생채기가 그어진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 했다. 그러나 문스타씨는 “해리 포터와 신데렐라도 고아로 나오잖아요”라며 이제는 생부모도 찾고 싶고 한인 커뮤니티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했다.
이석호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