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조(사진) 산부인과 전문의는 최근 30년간 환자를 돌봐왔던 플러싱 진료소 문을 닫아 아쉬움이 많다.
지난 1977년 플러싱 메인 스트릿 선상에 개업한 진료소는 박전문의에게는 생활의 터전이자 사연도 많고 의사로서 긍지를 느끼게 해주었던 곳이다.
연세대학 의과대학을 나와 해군 군의관 복무후 1972년 뉴욕으로 온 그는 브루클린 루트란 병원 인턴, 플러싱 병원 레지던트, 슬론 케이터링 메모리얼 암병원 레지던트 펠로십 과정을 마친 후 개업했다. 한인 산부인과 의사가 드물었던 당시 미리 뉴욕에와 산부인과 전문의로 자리잡은 누나 소노다 박씨와 함께 개업했지만 남자의사 인데다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보이는 외모 때문에 한인 환자들로부터 햇병아리 취급을 받는 바람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서른 넘은 의사임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안 얼굴 때문에 개업 후 겪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산모와 어린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세월이 흘러 자신이 받아 낸 갓난 아이가 자라서 결혼 후 산모가 되어 진료를 받으러 왔을 때, 그에게서 수술 받아 아이를 낳은 환자가 학부형이 되어 아이를 데리고 와 ‘이 분이 널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도와준 의사 선생
님이시란다“라고 소개할 때 더없이 뿌듯하고 보람을 느낀단다.
플러싱 진료소를 닫은 후 현재는 롱아일랜드 뉴하이드 팍 진료소에서만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그는 롱아일랜드 노쇼의과대학 병원의 최초 한인 산부인과 전문의로 91년부터 지금까지 16년째 노쇼병원의 산부인과 수술환자를 맡고 있다.
박전문의는 “처음 외과를 선택하려했으나 외근이 많고 고달픈 분야라 가정을 생각, 산부인과를 선택했는데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산부인과 의사는 새생명 탄생에 일조하는 보람있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
지금껏 순탄하게 큰 고생 없이 살아왔고 자식들도 문제없이 잘 자라 준 것은 복이라 생각하며 네아이 키우느라 고생한 부인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가급적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고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등 평소 건강 관리에 철저한 편이다.
뉴욕한인개업의 협회 3대 회장, 연세대 의과대 동창회 사무총장, 롱아일랜드 한인회 초대 부회장을 역임했다.퀸즈 YWCA 한정숙 전회장과의 사이에 변호사인 첫째딸 진수, 둘째딸 진희, 드렉셀 의과대학병원의 방사선과 레지던트인 큰 아들 한성, 엔지니어 출신으로 현재 샌프란시스코 미대에서 산업미술을 전공중인 막내아들 문성씨 등 2남 2녀를 두었다,
<김진혜 기자> jh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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