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기록이다. 활자 하나하나에 역사의 도도한 물결이 담겨 있다. 그래서 기사든, 광고든 신문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 그 속에 우리의 모습이,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인사회와 함께 웃고, 울은 지 어느 것 40년.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면 하늘의 별 만큼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과거가 없으면 오늘도, 미래도 없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며, 느끼게 된다. 색 바랜 신문들 속에 아직도 숨 쉬고 있는 한인사회의 역사 40년을 정리해 본다.
1974년 11월3일 올림픽 가에서 펼쳐진 코리안 퍼레이드는 한인사회의 위상을 주류사회에 알리는 기회였다.
이민문호 열려 부흥 ‘기틀’
한인 업소 3백개 밀집
첫 코리안 퍼레이드 ‘뿌듯’
70년대 한인사회의 부흥은 ▲1968년 새 이민법(일명 케네디법) 발효 ▲1969년 한국일보 창간 ▲1972년 4월19일 대한항공 LA노선 취항이 어우러졌기에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민문호가 활짝 열리고, 한국과 동시간대 정보 공유, 그리고 한국과 미국과의 인적, 물적 교류 시스템이 갖춰진 셈이었다.
연방센서스 통계에 따르면 1970년 LA시 한인인구는 8,811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70년대 한인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그리고 한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덤볐다.
한인업소록의 시초였던 1972년 1월1일자 제작된 업소 전화번호부에는 한인업소가가 69개, 단체는 18개였지만 70년대 후반에는 올림픽 가에만 한인업소가 300여 곳에 이를 정도로 양적 팽창을 이뤘다.
1973년은 올림픽 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운동이 본격화 됐다. 2월21일 발족한 코리아타운 번영회는 한인타운 구간을 남북으로 올림픽과 8가, 동서로 웨스턴과 버몬트 길로 잡고 한글 간판 달기 운동을 전개했다.
분명 한인사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실감할 수 없었던 한인들은 1974년 11월3일 올림픽 길에서 펼쳐진 1회 코리안 퍼레이드를 통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수 많은 인파가 길거리를 가득 메운 모습에서 자신의 위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1978년의 최대 이슈는 ‘이철수 사건’이었다.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연루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감옥안에서 백인죄수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수씨의 기구한 운명을 새크라멘토 유니언지 이경원 기자가 이해 1월29일자 상세히 보도하면서 시작됐다. 한인사회는 3월4일 유재건 변호사(훗날 한국서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3선 연임)를 중심으로 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구명활동에 돌입했다.
1979년 5월27일과 28일 1회 백상배 미주오픈이 열려 뉴욕거주 빌리 홍씨가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홍씨는 안타깝게도 1983년 9월1일 일본 호카이도 북방해상에서 발생한 소련 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 007기 피격사건으로 다른 268명의 승객 및 승무원들과 함께 사망하는 비운을 겪었다.
한편 70년대 후반 한인들의 모국방문이 붐을 이루면서 귀국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물 보따리상이 성행했다. 이 때 한국에서 가장 인기를 얻었던 것이 영양제 ‘게브랄티’였다. 이 영양제를 만들던 회사는 당시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으나, 한인들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회생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1971년. 1. 17 남가주 한인교회연합회 창립
3. 29 한인1세 장기열씨 첫 치과 개업
6. 7 남가주 한인상의 출범
7. 14 재미한인체육인협회 설립
12. 11 재미한인 정치협회 성립
1972. 4. 19 대한항공 LA노선 취항
9. 30 미 정부 시민권자 제외 한인 5만2,313명으로 집계
10. 28 남가주 한인회관 건립위 발족
1973. 2. 21 코리아타운 번영회 창립
4. 18 미 정부 군입대 자격 영주권자로 제한
7. 21 샌디에고 한인회 창립
11. 9 공인회계사협회 창립
11. 10 남가주 한인약사회 창립
1974.11. 3 제1회 코리안 퍼레이드
11. 9 ‘고추사건’ 발생. 한인 주유소 직원들이 백인 7세
남자 어린이가 귀엽다며 고추를 만졌다가 체포.
11. 18 LAPD 동양인 수사과 개설
11. 26 차량국 한글 운전 안내서 발간.
11. 22 현 한인회관 건물 개관
1976. 2. 7 무궁화 학원 ‘남가주 한국학교’로 개칭
4. 9 재미무역협회 창립. 회장 이창, 이사장 김죽봉
7. 6 재미 여성경제협회 창립. 회장 최계옥
9. 21 신상혁씨 가주 공인 첫 침구사
10. 7 삼각관계로 유학생 김기덕씨(25) 아주사 대학서 입
양아 출신 데이빗 김(20)씨 난자 살해
10. 21 김기성씨 LA한인회장 선거 단일후보 무투표 당선
1977. 1. 21 한글 운전면허 시험 시행
7. 15 프레즈노서 모텔 운영 이위영씨, 함께 일하던 딸
해고에 앙심품은 종업원에 의해 암매장 피살
8. 20 한인 가장 부부싸움중 냉장고서 꽁꽁 언 고깃덩어
리 꺼내 던졌다가 부인 사망
1978. 2. 28 도산 안창호 선생 장남 필립 안 82세로 별세
4. 26 샌프란시스코 인근 미국가정에서 한인입양아 독살
5. 5 폴 김(27) LAPD아케데미 졸업. 커맨더까지 역임
12. 11 한인교회 218개, 목회자 300여명(기독교연합회)
1979. 1. 1 UCLA 도서관장에 김익삼씨 취임
3. 24 오렌지카운티 한인회 출범
9. 16 대한항공 LA직항노선 첫 취항
1972년 3월22일 남가주 한인회가 올림픽 가에 마련된 새 사무실에 간판을 걸고 있다.
# 숫자로 본 70년대 한인사회
▲70년대 초 한국일보 구독료 4달러
▲1970년 연방센서스 LA한인인구 8,811명
▲1972년 2월22일 현 총영사관 관저 매입가 15만달러
▲1974년 올림픽가 인근 주택가격 2만5,000-3만달러(30년된 주택 기준)
▲1978년 LA시 초등학교 한인학생수 3,600여명 불과. 당시 윌튼 플레이스 초등학교 한인 재학생 465명.
▲1979년 땅값: 올림픽가 20달러(스퀘어피트 당), 윌셔가 12달러
<황성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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