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 독자 배창규씨 ‘40년 지기’ 한국일보에 바란다
인생을 살면서 40년 지기 친구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가까이 두고 매일보고 싶은 친구가 있어도 40년을 곁에 두기는 힘들다. 40년을 채우기 전에 이런 저런 이유로 곁을 떠나기도 하고 작은 일로 우정에 금이 가서 인연이 끊어지기도 한다. 매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40년 지기 친구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고달픈 이민생활 속에서 한국일보를 40년 지기 친구로 간직해 온 창간 독자 배창규씨(72·부에나팍·영어명 존)를 만나봤다. 배씨와 한국일보와의 인연은 4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65년 미국으로 이민 온 배씨에게 한국의 친구가 고향 소식을 접하라며 2~3주에 한 번씩 한국의 한국일보를 모아서 국제우편으로 보내주었다. 배씨는 “멀리 태평양을 건너 고국의 소식이 한 뭉치씩 날아드는 날이면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한국일보를 독파하고 기사 하나하나를 며칠씩 되새기며 읽었다”고 회상했다. 이민 초기, 밀려드는 향수를 신문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이겨냈다. 배씨는 “1969년에 한국일보가 미주판을 창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이제는 한국 신문 그만 보내줘도 된다고 했죠. 1969년 12월부터 한국일보를 받아보기 시작했는데 매일 한국어 신문이 집으로 배달된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즐거웠다”고 기억했다.
처음엔 4면짜리 우편 배달
한 글자도 안 빼먹고 읽어
한달치 모아 친구들 주기도
매일 신문 읽으며 하루 시작
나이 들면서 부음란 꼭 챙겨
끝까지 책임지는 기사 써야
창간 당시의 한국일보는 하늘하늘한 신문지도 아닌 딱딱한 잡지용 종이에 찍힌 단 1장의 4면짜리 신문이었다. 자체 배달 시스템이 없어 일반 우편으로 배달됐다. 광고도 식당 몇 개가 전부였고 본국 기사가 신문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때 한국일보는 혼자 보고 버리는 신문이 아니었어요. 보고 달라는 친구들이 많아서 내가 읽고 나면 한달치를 모아서 친구들에게 줬지요. 그러면 한국일보를 읽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한국 이야기 참 많이 했습니다. 고국 소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뻤지요.” 한국에서 누가 왔다고 하면 한국 소식을 듣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는 시절이었으니 한국일보를 재활용해서 읽는 것은 당연했다.
배씨는 “퇴근 후에 집으로 배달된 4면짜리 한국일보를 반가운 마음으로 읽던 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100면이 넘는 신문을 읽다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며 “버릇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은퇴를 하고 나서도 하루라도 신문을 읽지 않으면 큰 일이 빠진 것처럼 이상하다”고 말했다. 배씨는 10여년 전 다니던 미국 직장에서 은퇴한 후 한국일보를 읽는 것이 가장 큰 낙이라고 말한다. 아내로부터 “신문을 끼고 사는 양반”이라는 애정 어린 핀잔을 들을 정도다. 새벽 5시30분에 한국일보가 배달되면 스포츠팬인 배씨는 스포츠면을 가장 먼저 읽는다. 시즌별로 농구와 풋볼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스포츠 매니아로서의 지적 욕구를 충족한다. 명쾌한 경기 분석과 재치있는 헤드라인을 볼 때마다 신문 보는 재미가 붙는다고.
스포츠 섹션을 마치면 본국지를 펼친다. 배씨는 “한국 정치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한국 정치판 돌아가는 소식을 읽으면서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해서 한국 국민들이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며 44년 전 떠나온 고국에 대한 애정을 내비쳤다.
배씨가 유난히 관심을 두고 읽는 본국지의 작은 섹션이 있다. 부고와 인사이동 난이다. “신문을 꼼꼼히 읽는 편이기 때문에 부고와 인사이동 난에 학교 동창들 이름이 나오면 꼭 연락해서 인사를 했어요. 20~30여년 전에는 동창 부모님들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많이 봤는데 얼마 전부터는 부고에 동창들 이름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해 세월의 무심함을 느끼죠.” 배씨는 정성을 기울여 읽는 본국지 부고가 최근 없어진 것 같아 섭섭하다고 말했다. 배씨는 “하찮은 부분 하나라도 관심을 기울여 읽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사를 쓰고 편집을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본국지 다음으로 읽는 사회면은 로컬 소식을 좋아하는 아내가 관심이 많은 섹션이기 때문에 깨끗하게 읽고 전해준다. 교육 섹션은 손자의 교육을 위해 열심히 읽고 당뇨병 진단을 받고 난 뒤에는 건강섹션도 유난히 관심이 많이 간다. 레저나 부동산 섹션을 볼 때마다 계절이 바뀌고 세상의 흐름이 변하는 것을 느낀다. 배씨는 아침식사 후 경제면을 읽는 것으로 1시간30분 정도 걸리는 ‘오늘의 한국일보 읽기’ 일과를 마무리 한다.
한국일보를 40년 동안 읽다보니 창간호 등 중요한 날의 신문은 일부러 많이 모아두었는데 2년 전에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모아둔 신문을 버린 것이 아쉽다고 했다. 한국일보 창간 20주년과 30주년에는 오랜 애독자로 뽑혀 감사패를 받고 집에 걸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감사패도 이사를 오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과거의 기억을 너무 소홀히 다룬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들지만 한국일보와의 기억은 매일 배달되는 신문처럼 매일 새롭다는 것이 배씨의 생각이다.
“창간 30주년 때도 창간 독자라는 이유로 다른 몇 명의 독자와 함께 인터뷰를 했어요. 불과 10년 전인데도 그때는 지금보다는 많이 젊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수십 년 이상하면 전문인이 된다는데 30주년에 이어 창간 40주년에도 애독자 인터뷰를 했으니 저도 한국일보 전문가 아닙니까?” 그의 넉넉한 웃음이 이어졌다.
그가 신문을 정성들여 읽는 또 하나의 이유는 친구들과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배씨는 “근처에 사는 친구들과 1주일에 3번씩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데 신문을 읽지 않으면 할 얘기가 없다”며 “얼마 전에 ‘강호순 연쇄 살인범 검거’ 때는 친구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워낙 신문을 꼼꼼히 읽는 편이라서 정보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배씨도 요즘에는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한다. 예전에는 신문을 정기 구독하지 않는 친구들보다는 정치상황 등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먼저 많이 안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컴퓨터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인터넷을 하지 않다보니 슬슬 차이점을 느낀다.
“신문에서 선거했다는 기사를 읽고 친구들에게 이야기 하면 인터넷을 하는 친구들은 이미 당선자를 알고 있어요. ‘약간 김이 빠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신문을 넓게 펼쳐 놓고 한 눈에 모든 기사를 보며 읽는 맛은 인터넷도 따라올 수 없죠. 그게 제 성격에 맞아요.”
배씨는 자신이 신문을 읽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빠르고 편리한 것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이 손에 잉크를 묻혀가며 기다렸다 읽는 신문의 참맛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무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한국일보 지면이 4면밖에 안 됐어도 정말 한 글자도 빠뜨릴까 열심히 읽었지만 요새는 지면이 너무 많고 광고도 많아서 반 정도만 읽는 셈입니다. 지면이 두꺼워지는 것은 정보를 많이 전달하고 싶은 신문의 욕심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신문이 얇아도 알찬 정보가 있다면 독자들은 신문을 찾을 겁니다. 독자들은 두꺼운 신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내용의 신문을 찾는 것이니까요.”
‘평생 애독자’라고 자부하는 배씨는 한국일보에 바라는 점은 “끝까지 책임을 지는 기사”라고 말했다. 몇 년 전 절친한 친구가 사망했을 때 친구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에 친구의 프로필이 잘 못 기재돼 기사 정정을 요구했는데 반영되지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배씨는 아버지와 어머니, 장인, 장모의 장례를 모두 미국에서 치르면서 신세를 진 사람들이 많아서 부고와 사망 기사는 더욱 꼼꼼히 챙긴다. 잊지 않고 신세를 갚고 싶기 때문이다. 배씨는 “나이가 드니까 친구나 아는 사람이 사망했다는 부고나 기사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며 “저물어 가는 이민 1세대를 위해 부고만을 다루는 부분을 신설하는 것도 제안하고 싶다”고 말했다.
40년을 한결 같이 한국일보와 매일 대화를 나누는 배씨는 자신의 이민생활에 든든한 벗이 되어준 한국일보와의 인연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며 작은 기사에도 의미를 찾는 독자들의 관심을 기억해 줄 것을 당부했다.
창간 독자 배창규씨는 매일 아침 한국일보의 반가운 지면을 펼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배씨는 한국일보가 고된 이민생활의 동반자였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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