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주본사 40년의 역사는 미주 한인사회 언론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인들의 신 이민물결이 채 시작되기도 전인 1969년 6월9일, 40년 전 그 날은 미주 한인사회를 밝히는 새로운 등불이 켜진 날이었다. 당시 LA에 첫 발을 내디디며 미주 한인 언론사에 새 장을 연 이후 40년 동안 한국일보는 명실상부한 최고(最古)의 신문이자 최고(最高)의 언론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미주 한인사회의 역사적 사실 기록은 바로 한국일보의 창간으로 시작되었고, 한국일보는 늘 한인사회와 번영과 시련을 함께 공유하며 성장을 같이 해왔다. 이제 미주 한인사회 1등 신문을 넘어 주류사회 대표 언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한국일보 미주본사의 40년 역사를 사진으로 살펴봤다.
# 1969년 - 창간 당시 LA 한국일보의 첫 사옥의 모습. 한인 밀집지에서 떨어진 스튜디오시티의 벤추라 블러버드에 사무실 집기라고는 책상과 전화기, 소파가 전부인 단칸 사옥에서 출발했다.
# 1971년 - 한국일보 LA지사는 LA 한인타운 내 1가의 새 사옥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 지사의 목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당시 새 사옥의 모습.
# 1989년 - 창간 20주년을 맞아 일일 평균 72면을 발행하며 사세가 100배나 성장한 한국일보는 미주 최고의 한인 신문이자 가장 성공적인 소수계 신문일 뿐 아니라 한인사회 최대 규모 기업 및 가장 성공적인 신문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버몬트 사옥 앞에 모인 전 직원의 모습.
# 1997년 - 5월31일 한국일보 미주본사는 창간 이후 세 번째 사옥인 현재 사옥으로 이전하며 미드윌셔로 급팽창한 한인사회와 함께 ‘윌셔시대’를 열었다. 윌셔와 로스모어의 한국일보 신사옥의 이전 당시 모습.
# 1982년 - 한미수교 100주년과 창간 1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대륙횡단 특별 취재가 미국은 물론 한국을 통틀어 한인 언론사상 최초로 기획됐다.
# 1969년 - 첫 LA 한국일보는 항공편으로 공수된 한국일보 본지 중 4면을 복사 발행하는 것으로 소박하게 출발했다. LA에서 한국일보의 첫 인쇄가 이뤄진 1969년 6월, 당시 장재구 LA 지사장(현 본국 한국일보 회장)이 한국일보 LA의 첫 인쇄기를 조작하고 있다.
# 1975년 - 12월 한국 정부의 개각 뉴스를 알리는 한국일보 벽보를 한인들이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 1976년 - 미주 한인 언론의 선두주자인 한국일보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와 코리안 퍼레이드 등 적극적인 커뮤니티 사업을 통해 한인사회의 동반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당시 한국일보 꽃차를 비롯한 퍼레이드 행렬이 한인타운을 수놓고 있다.
# 1991년 - 미주 한인언론사 최초로 컴퓨터 편집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편집국 전 업무의 전산화라는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당시 전산 제작 시스템으로 신문 지면을 제작하고 있는 모습.
# 2003년 -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일보가 마련한 제1회 ‘할리웃보울 한인음악대축제’는 세계 최대 야외음악당인 할리웃보울이 2만여 한인으로 가득 차는 역사적 장관을 연출하며 한인사회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첫 회 할리웃보울을 가득 메운 한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하는 모습.
# 1984년 - LA 올림픽은 창간 15주년을 맞은 정상의 신문 한국일보의 저력이 특별히 빛난 행사였다. LA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한인 커뮤니티 올림픽 중계장’으로 한국일보를 선정, 한국일보 강당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됐다.
# 1994년 - 본국 한국일보 창간 40주년 및 미주본사 창간 25주년을 맞아 ‘세계로 뛰는 세계 속의 한인들’ 등 굵직굵직한 특집을 위한 특별취재단이 종횡무진 활약했다. 당시 그랜드캐년에서 한국일보 깃발을 들고 있는 특별취재단의 모습.
# 1999년 - 뜻깊은 창간 30주년을 맞아 한국일보 미주본사는 미국 내 최고 권위지인 LA타임스와 파트너십을 체결, 한국일보 독자들에게 LA타임스 일요판을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한인사회를 넘어 주류사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언론으로 위상을 높였다. 본보를 방문한 마크 월러스 당시 LA타임스 발행인이 장재민 회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1992년 - 한인 이민사회의 최대 상흔으로 남은 LA폭동 당시 한국일보는 피해자 구호 운동에 가장 선도적으로 나섰다. 폭동 발발 후 LA로 날아온 김대중 당시 민주당 대표가 한국일보를 방문, 박흥진 당시 편집국 국차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 1972년 - 1972년 2월 킹 프레스 고속 윤전기를 도입하면서 한국일보 LA지사는 일간신문으로서의 본격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또 제1회 남가주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주관하며 한인사회에서 사업의 폭을 넓혔다.
# 2007년 - 세계 최고의 권위지인 뉴욕타임스와 손잡고 영어로 된 뉴욕타임스 특별판을 매주 발행하기 시작해 다시 한 번 주류사회에 한국일보와 한인사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장재민 회장이 뉴욕타임스 발행인 아서 슐츠버거 2세와 제휴 협정을 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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