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년대에 접어들어 뉴욕 한인사회의 인구가 급격히 팽창했다. 당시 미국에 유입된 한인 이민들은 정착에 필요한 재산이나 정보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그룹이었다. 한국을 떠날때 현지정착에 대한 가이드도 없었고 출국시 수밸달러 이상의 현금도 지참하지 못하도록 규정으로 막았다. 달러 사정이 좋지 못하던 시절의 풍속도였다. 이들이 미국에 떨어졌을때 어디 한곳 기댈만한 언덕이 없었다. 또한 장착과정에서 갖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봉사기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무렵 뉴욕일원에서 출범한 전문 봉사기관으로 현존하는 3기관을 돌아본다.
뉴욕한인봉사센터(Korean Community Service)
▲KCS 커뮤니티 센터 건물(위쪽)과 한진관 목사 부부.
70년대 초 플러싱에 자리잡은 퀸즈한인교회가 교회내에 한인봉사센터를 개설했다. 당시 한진관 목사는 목회뿐만 아니라 한인가정을 이질문화 속에서 정착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교회가 신도들의 영적인 예배와 안식의 장소일뿐 아니라 현지 정착을 위한 봉사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현실을 받아들여 1973년 이민자들에게 효율적인 정착지원을 하기 위해 연방정부로 부터 자금을 지원받는등 정식으로 인가된 한인봉사센터(Korean Community Activity Center)의 개설을 보게 되었다. 봉사센터에서는 한글학교, 영어교실, 번역및 대서, 영주권 신청, 직업알선, 자녀취학 상담, 통역, 소셜 시큐리티 취득, 구제사업등을 담당했다. 연간 약5천건에 달하는 봉사업무를 첫 6년간 3만여건 처리했다. 사회사업을 전공했던 김태열 사모가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필요한 사회보장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고 김준성 목사는 성인 영어교실을 운영했다. 그리고 77년 교회성장과 함께 한진관 목사의 목회전념 방침으로 봉사센터는 발전적으로 분리되어 독립했다. 이때 개칭된 기관이 뉴욕한인봉사센터(Korean Community Services of Metropolitan New York, Inc. K.C.S.)였다. 이후 KCS는 최우길, 신태균, 엄젬마등이 동참하여 공적혜택(entitlement), 응급환자 입원알선, 무의탁자 보조, 정보및 안내(Information & referral)등 이민생활과 직결되는 서비스를 주로 제공했다.
1979년 엄호웅(당시 한국일보 사장)의 주선으로 KCS는 맨하탄 34가에 있는 빌딩(빌딩주 장용호)으로 이주했고 Koman Sports Wear(사장 조일환)는 매월 $1,000씩 8년동안 지원했다. 1984년 퀸즈구청으로 부터 KCS가 특별기금을 받아 1986년 한인경로회관을 개설(우드사이드 한성교회)함으로 한인사회는 처음으로 정부와의 계약에 의한 후원을 받게 되었다. 노인복지에 또 서하나의 획기적인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다양한 교육, 오락, 노인복지 서비스, 점심식사, 그리고 정보, 안내서비스가 제공됐다. 한성교회에서 시작된 경로회관은 1993년에는 코로나에 위치한 뉴욕그리스도의 교회로 이전되어 한인노인들에게 지속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고, 특기할 발전은 1996년 City Meals on Wheels와 협의하여 100명의 거동이 불편한 노인 (Homebound seniors)들에게 주6일 점심을 배달하는 가정급식 프로그램이 개설되었다. 2006년 1월에는 플러싱 159가 교회를 인수하여 KCS 커뮤니티센터를 개설, 주중과 낮 시간에는 KCS의 교육센터및 노인 데이케어로 사용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지역사회 각종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현재 김광석 회장에 의해 지역사회관과 진료소가 들어갈 제2차 건물 마련을 위한 모금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뉴욕가정문제연구소(The Korean Family Counseling and Research Center )
가정문제 연구소는 1974년 동포가정의 문제점들을 간파한 여성운동가 염진호(사진)의 뜻에 동조한 32명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뉴욕한인여성회가 모태가 되었다. 가정과 직장생활을 양립시켜야 했던 당시 대부분의 이민가정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은 한국에 비해 커졌고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점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여성들, 고부간, 시누이간의 갈등, 알콜중독등이 그시대에 대표적으로 나타난 가정문제였다. 직장에서는 불평등한 노동조건으로 고생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염진호는 개인전화를 통해 전화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독신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아파트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주로 여성문제의 상담을 받았다. 직접 발로 뛰면서 여성들의 가정문제, 인권문제등을 다뤘다. 집에서 쫓겨난 여성, 가출한 여성들을 자신의 아파트에 보호하며 문제의 남편, 시어머니를 직접 만나 불평을 해결하고 법적으로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와함께 외로운 노인들을 위해 매년 경로잔치를 주최했던 것이 76년 대뉴욕지구 한인상록회의 출범을 유도했다. 당시 한인사회 최초의 대규모 경로잔치는 맨하탄 인천집(대표 이희호)의 협찬으로 이루어졌다. 1983년 4월 염진호는 발기인 김재택, 남병현, 손창문등과 함께 가정문제상담소를 창설했다. 이듬해 플러싱으로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이민가정 상담을 시작했다. 창립 목적은 낯선 풍습과 새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화, 언어, 자녀교육, 법적 문제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87년 3월30일에는 연방정부로 부터 비영리단체로 승인됨과 동시에 단체명을 오늘날의 가정문제연구소(The Korean Family Counseling & Research Center)로 개칭했다. 그가 1989년 별세하자 한인사회는 그의 업적을 기려 교포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그 후임으로 레지나 김 소장이 오늘날까지 봉사하고 있다.
YWCA

1978년 5월6일 한인YWCA가 창립됐다. 창립 회원은 이경애, 김은순, 이정숙, 서희전, 홍인숙, 김명자, 우옥임, 장순옥, 김영자등 한국 YWCA에서 활동한 실무자, 자원봉사자등 9명이 중심이 되었고 때마침 드루신학교를 마치고 귀국하려던 홍인숙총무로 그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한인YWCA(The YWCA of the City of New York Flushing Branch) 명칭으로 ‘어린이 방과후학교’를 운영하면서 1979년 동포사회 처음으로 어린이 여름학교를 개설했고 2세를 위한 한국학교, 1993년 회관이 완공되면서 어린이 유아원을 개설했다. 1981년에는 ‘YWCA어린이 합창단’이 창단됐다. 70-80년대 노인들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노부모님들을 위한 노인대학, 늘푸른 대학을 개강하여 손주와 대화할수 있는 영어강좌, 시민권 강좌, 미국사회, 역사, 문화강좌, 음악, 무용등 강좌 외에 늘푸른 합창단은 미국사회에도 큰 감동을 주게 되었다. 초창기 YWCA는 한국의료원 건물에 잠시 머물다가 현재 42-07 파슨스 블러바드에 위치한 자체건물을 만들기 전까지 퀸즈 식물원 입구 건물을 임대하여 사무실과 어린이 방과후학교 프로그램, 주부들을 위한 교양 프로그램, 생활상담, 복지상담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후 YWCA는 서비스를 타민족들에게도 확대했고, 청소년직업, 교육, 아동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및 오락, 주부와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그리고 가정간호 서비스등을 발전적으로 전개하게 됐다. YWCA는 어린이로부터 노인, 가정, 특히 여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한 첫 여성기관이며 기독교 기관이다. 자체 회관이 완공된 후부터는 한인만이 아닌 전체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봉사센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993년 현 Y회관을 건립하고, 뉴욕시 YWCA 플러싱 지부로 활동하다가 26년만에 그 활동을 National YWCA/USA로부터 인정받아 미국Y 역사상 이민온 소수민족 한국여성들이 지역Y인 YWCA of Queens로 인정받은 첫 사례가 되었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