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은 흰 고깔을 쓰고, 나목(裸木)은 갑사(甲紗) 옷을 입고 있다. 닫혀 있는 커튼 한 가운데가 뿌옇다. 분명 밤사이 눈이 내렸음이다. 어제 한낮 외출했다가 집에 도착했을 때 우박이 잔디밭에 내려 꽂혔다가 소리 없는 눈으로 변한 것을 보고 잠이 들었었는데 이른 아침 커튼을 젖히는 순간 “와- 이런 설경(雪景)은 평생 처음이구나”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즐비한 나목, 집 앞의 벚나무는 갑사 옷을 입고 승무(僧舞)를 추다가 그 기다란 박사(薄紗)를 양 사방으로 드리운 채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형상이다. 어제는 하늘과 땅이 한 점 오점(汚點)없이 혼연일체 흰색 일색이었고 하얀 들판에 보이는 것은 정확하게 모가 진 장방형의 두부 두세 개씩을 이고 있거나 고깔을 쓰고 있는 집들이 듬성듬성 찻길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보일뿐이었는데 오늘은 부분적으로 태양이 동쪽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고 여명을 연출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눈경치를 흔해 빠진 영상(映像)으로 담아 놓지 못하는 아쉬움, 나의 미련함.
지난해 늦가을 석양 무렵, 메릴랜드 켄싱턴에 있는 브룩 가든(Brook Garden)서 있었던 국화 전시회에 갔다가, 열린 백에서 카메라 배터리 충전 연결선이 빠져 나간 것을 집에 와서야 알았다. 보충시켜야지 생각하면서 뜻 없이 바삐 지내다 불의의 사고로 인한 무릎 슬개골절 수술, 워커(Walker) 도움 없이 외출 불가능 등등으로 나의 카메라는 촬영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때문이다. 태양이 나무 가지 끝까지 사뿐히 눈이 앉아 각을 이루고 있는 신선함을 녹여 없애기 전에 영상으로 담아놓아야 하는데 할 수 없이 망막 속 깊숙이 담아 두었다가 반추하듯 떠올려 감상할 수밖에 없다. 수목(樹木) 중에서도 벚나무는 유연성이 뛰어나서 위핑 트리(Wheeping Tree) 모양 사방으로 펴져 땅에 닿을 듯하다가 끝의 가지가 살짝 튕겨 올라가 봄의 약동을 머금고 다시 승무를 출 기세다.
세계 각국 나라마다 사는 방법이 다르니 춤의 종류도 많을 수밖에. 정글 속 비경(秘境) 속에 숨어사는 오색조(五色鳥), 나래를 활짝 펴고 암컷 앞에서 자신을 과시, 전후(前後) 좌우(左右)로 왔다갔다 머리와 몸통을 따로따로, 고개 또한 좌우로 흔들면서 또는 거꾸로 매달려서 춤을 추는 모습을 일상으로 보며 살아 온 원주민들의 생동감이 넘치는 춤, 카리브해 연안을 끼고 살아가는 섬나라 사람들의 춤은 야자수 잎이 흔들리듯 또는 몽유병 환자처럼 하늘하늘 카립소 스타일로 춤을 춘다. 우리 부부는 춤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 편이고 건강을 위해 많은 춤을 추어왔다. 볼룸댄싱(Ball Room Dancing), 라틴 댄스, 컬럼비아 나라의 민속춤, 알젠틴 탱고까지. 원시인의 둥둥 북치는 소리, ‘칸론베’ 리듬에서 시작되었다는 알젠틴 탱고는 쉬운 춤이 아니다. 클래식 뮤직으로 출 수 있는 수준이면 전문가에 가까운 춤 수준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 고유의 승무를 제일 좋아한다. 승무는 소울(Soul) 춤이기 때문이다. 승무를 추는 여인의 아름다움, 갑사 옷을 입고 고깔 쓴, 그 속에서 살짝 내리깐 눈망울 속에 인간 고독의 슬픔을 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자락 흐트러짐이 없이 혼신의 힘을 모아 세속의 백팔번뇌(百八煩惱)를 흡수하고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으로 보일 듯 말듯 외씨버선 끝, 모(角)없는 움직임의 아름다움이 보는 이들을 무아지경으로 끌어들이는 그 승무가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특히 눈 오는 밤에.
이 시점에서 태양은 백천에서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숨었다 하면서 나목 위에 쌓인 눈을 서서히 녹여가고 있으니 세지(細枝)가 유연한 곡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봄의 서곡(序曲)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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