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급성장하는 교회로 꼽히며 뭇 교회들의 부러움 속에 초대형 건물을 올리던 한 한인교회가 융자금을 갚지 못해 차압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그렇지만 그동안 생업을 통해 번 피땀 어린 돈을 교회건축을 위해 바쳤던 수많은 교인들의 헌신이 자칫 헛수고가 될지 모르기에 더욱 그렇다.
총 예산 수천만달러로 공사가 시작된 지난 2005년 이 교회 출석교인은 2,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내분을 겪으면서 교인수가 3분의1로 줄어든 상태다. 교회가 추진하는 일에는 믿음이 가장 큰 자본이라지만 현실적으로 버거운 상황임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담임목사는 “하나님이 도와줄 것으로 믿는다”는 답변만 내놓고 있다. 하지만 당장 급한 불을 끈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이 교회의 차압위기는 과욕이 부른 결과이다. 인간들은 바로 눈앞의 일도 예측하지 못하면서 100년의 일을 도모한다.
한국교회들, 그리고 그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미주 한인교회들은 자기 건물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집을 갖는다는 것은 안정을 의미하니 건물에 대한 욕망을 무조건 탓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가 심하다. 교회를 시작하면 자체 건물을 구입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가 된다.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 자기 건물을 갖고 교인수가 늘면 조금 더 큰 공간을 갖고 싶어 한다. 이런 심리에는 교인수와 교회건물을 목회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그릇된 풍토의 영향도 크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무리를 부른다. 그래서 능력에 맞지 않는 건물을 지으려 든다.
그러다 보면 화려한 교회건물을 세운 후 교인들이 이를 짊어지고 가느라 허덕거리는 일이 생긴다. 버블이 터지기 전 주택시장 상황과 유사하다. 교인들은 유형무형의 헌금 압력을 받게 되고 눈치가 보인다. 이 때문에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성경은 특정 건물이 아닌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특정 공간을 교회, 심지어 성전으로 여긴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라는 잘못된 명분 아래 좀 더 크고 화려하고 높은 건물을 짓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예수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같이 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지칭한 교회는 특정 공간이 아니다. 또 그곳에만 거하겠다고 밝힌 적도 없다. 절대자는 어느 건물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는 편재성을 가지고 있다. 예배당은 특별히 구분되어진 장소가 아니다. 다만 예배의 편의를 위해서 필요한 곳일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들은 편리성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건물인 예배당을 세우는 일에 목숨을 건다. 큰 건물을 지어놓고 절대자를 찬양하지만 실제로 밑바탕에는 목회자의 에고와 과시욕, 그리고 교인들의 자기만족이 자리 잡고 있다. 기독교 윤리회복 운동을 벌이는 한 목회자는 “한국교회는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라는 딱 세 마디만 한다”고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것이 많은 교회들의 자화상이다.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지어 놓으면 부담은 되지만 교회 입장에서는 좋은 점이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큰 교회를 선호하는 많은 잠재적 교인들을 끌어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크게 지어 놓으면 채워진다는 그릇된 인식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인근의 많은 군소교회들은 무너진다. ‘월마트 현상’이 교회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가 교회에 준 소명은 흩어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흩어지려 하기보다는 “더욱 더 많이”를 외치며 모으기에만 열중한다. 그런 점에서 자기 교회건물 소유를 포기하고 교인수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분가를 반복하는 일부 교회들의 모습은 신앙적이다. 아쉬운 것은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런 교회들이 아직은 비주류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는 본질을 잃어가는 중세 교회들을 향해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고 악마는 교회당을 만들었다”고 꾸짖었다. 거대한 첨탑을 자랑하며 위용을 뽐내던 유럽의 수많은 교회당들은 지금 교인들은 잃어버린 채 관광장소로 전락해 있다. 루터의 일갈이 더욱 생생히 와 닿는 요즈음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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