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후 유학생 늘면서 1960년대 인구 400여명
플러싱 전철 생기기전 대부분 맨하탄 어퍼지역 거주
1955년 뉴욕한인유학생회. 1960년 뉴욕한인회 출범
한국을 미국과 세계에 알리는 미주한인사회의 홍보 노력이 이미 1950년대부터 뉴욕 일원에서 활발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재외한인사회연구소(RCKC·소장 민병갑 퀸즈칼리지 석좌교수)가 18일 공개한 ‘해방 후 뉴욕일원 한인사회(1945~59)’ 연구 자료에서 중국의 속국이나 일본의 식민지로 오해하는 미국인이 많던 당시 한인 유학생들이 미국 단체 초청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이해를 높이는 활동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시기에 전개된 한국전 참전 미국인의 승전보가 보도되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이 증대됐던 것도 한 몫 더했다. 하지만 당시 활동은 한국공관이나 유학생회 등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홍보라기보다는 미국 현지 단체나 교회, 학교 주민들의 요구에 보응한 수동적인 형태로 평가됐다.
관련 자료는 뉴욕 한국일보 뉴저지고문이자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이기도 한 조종무 연구원이 최근 한국의 ‘중앙사론’ 36호에 발표한 것으로 1945년부터 1959년까지 뉴욕 일원 한인 인구 증가와 정착, 경제성장, 한인단체 및 기관의 태동 등을 집중 조명한 것이다.
■한인 인구 현황: 1960년 기준 뉴욕 일원의 한인인구는 400여명으로 추산됐다. 독립운동 관련 일부 인사들이 귀국대신 미국 정착을 택한데 이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한국 여권을 소지한 유학생들의 미국 입국이 속속 잇따랐고 1953년 휴전 이후로는 더 많은 유학생들이 유입됐다.
■주거지: 해방 전까지 유학생들의 편의에 따라 맨하탄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집중됐던 한인들의 주요 거주지는 유학생이 늘면서 점차 남하한다. 당시는 퀸즈와 맨하탄을 연결하는 지하철이 생기기 전이어서 플러싱의 한인 집성촌은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다.
■경제적 적응: 해방 전후 뉴욕 일원의 한인 자영업자는 많지 않았던 반면 고학력의 유학생이 많던 시기여서 전문직 종사자 비율이 크게 높았다. 더불어 하와이 노동이민자들의 이주로 철도공사와 교량공사 등에 종사한 막노동자도 뉴욕 일원에 상당수 거주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한인단체 및 기관: 1955년 조직된 뉴욕한인유학생회와 곧이어 조직된 전국 규모의 미주유학생총회 등이 활동했지만 조직적인 한인사회가 존재했다고는 보기 어려운 시기다. 유학생들의 활약에 힘입어 1960년 뉴욕한인회가 태동했지만 이에 앞서 1950년에 뉴욕총영사관 주도로 뉴욕한인회가 구성된 바 있다. 하지만 당시는 총영사나 은행장 등이 회장을 맞는 관제 성격의 한인회였고 유학생회 창립으로 학생회 역할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활동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월 100달러 미만이던 맨하탄 아파트 임대료를 비롯한 당시 한인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관련 자료는 연구소 웹사이트(koreanamericandatabank.org)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이정은 기자> julianne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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