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해병대원으로 참전해 장진호 전투에서 밀려오는 중공군과 싸웠던 스티븐 옴스테드 미 예비역 중장. 그의 양복 옷깃에 부착돼 있는 노란색의 빛나는 별모양 배지가 선명하다. 그 배지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을 때 인근 고토리에서 새벽에 보았던 별을 상징한다.
“1950년 12월이었죠. 압록강까지 연합군이 진격했고 1사단 소속의 저도 그들 중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추웠던지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몰살당할 수도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왔어요”19살의 팔팔하던 나이.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낯선 나라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벌였던 옴스테드 중장은 무슨 인연인지 다시 한국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버지니아 콴티코에 소재한 해병대 박물관 주변 공원에 세워지는 장진호 전투 기념물을 위한 모금 활동이다. 건립위원회 정식 멤버는 아니지만, 의욕만큼은 누구 못지않다.
“큰 기업들이 나서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모을 수 있는 액수죠. 그러나 그것보다는 한국전을 기억하는 미국 주민들과 한인들이 적극 참여해주면 좋겠어요. 그게 더 의미와 보람이 크죠.”조성 목표는 50만 달러. 그의 말대로 독지가가 한 번 선심을 쓰면 되는 규모다. 그러나 장진호 전투 기념물이 모두가 애착을 갖는 상징이 되려면 보다 많은 사람이 모금에 참여하는 게 좋다고 옴스테드 중장은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장진호 전투의 실상은 어땠을까?간단히 말해 중공군 7개 사단과 1만5,000여명의 미 해병 1사단, 200명의 영국 해병대, 3,000여명의 7사단 보병, 800여명의 카투사(미군 지원 한국군)들이 장진호 가까운 곳에서 2주간 대치했던 전투를 말한다.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은 중공군으로 인해 수적으로 워낙 열세인 연합군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 살아남은 약간의 병력은 ‘선택된 소수(Chosin Few)’로 불린다. 장진호를 일본어 발음으로 초진(Chosin)으로 부르는데 이를 비유해 부르는 말이다. 당시 연합군이 2주간 버티지 못했으면 흥남 철수도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국전 연구가들은 보고 있다.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 벨로우드 전투, 이오 지마 전투 등과 함께 미 해병대 역사에 빛나는 3대 전투 가운데 하나로 기록돼 있다.
옴스테드 중장은 흥남 철수를 통해 자유세계로 탈출한 한인들의 영웅으로 통한다. 그는 몇 년 전 한국 거제도에서 열린 흥남철수 관련 행사에 초청돼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제 한국전 참전 용사들이 나이가 많아 기념물이 가능한 빨리 세워지기를 희망한다는 그는 “북한의 어딘가에 묻혀 있을 동료들의 시신을 찾아오고, 나의 생전에 남북 통일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며 한인사회의 관심을 당부했다.
문의 (703)207-9588SOlmstead@MCLeague.org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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