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수<프랭클린 타운십 거주>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릴 때 그윽한 커피 향을 맡으며 향수에 젖어든다. 커피포트에서 솔솔 올라오는 김을 보면서 그윽한 연무가 결국 내가 살아온 결혼 생활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또 생각이 더 발전을 하여 커피포트에 피어오르는 연무처럼 나의 인생도 세월이 흐를수록 사라지는 연기가 아닐까하는 허무까지 느껴진다.
내년 봄이 결혼 생활 25주년 사반세기 은혼식이다. 나를 돌아보면 결혼 전에는 부모님 그늘아래 보호받고 있다 결혼을 하면서 한사람의 동반자가 되었던 것 같다. 결혼생활 초반은 그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과정을 돌이켜보면 훈련, 능숙, 완결이라는 단계를 거쳤던 게 아닌가 싶다. 아침 커피포트를 바라보면서 향수에 잠겼을 때 나의 삶이 커피 증류에 투명되어 왔다- 천천히 내려오다 막 끓어오르고 쭉 잘 나오다 김이 되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게 인생이 아닌지?
나는 이번 은혼식이 기다려진다. 다른 부부들처럼 애정확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엉뚱한 우리 남편이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이다. 5년 전 결혼 20주년 날 아침 출근하는 남편에게 “여보, 오늘 결혼 20주년예요. 축하해요”라고 말했더니 남편은 깜짝 놀라면서 “아니 벌써 20년이 됐어? 나는 결혼한 지 겨우 4~5년 지난 줄 알았는데. 정말 20주년 기념식 하려면 앞으로 십사오년 더 기다려라” 하고 후딱 나가버렸다.
순간 황당하고 짜증이 났고 심지어는 치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늘 하듯 커피 한잔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그래 나와 사는 시간이 즐겁고 늘 새로워 시간가는 줄 몰랐던 거야’라고 마음을 먹기로 했다. 그래서 내년 남편이 결혼 25주년이란 사실에 어떻게 반응할지 더 궁금해진다.
나 스스로도 생면부지의 타인과 사반세기를 살아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중매로 만난 사이여서 남들처럼 짜릿하고 열정적인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냥 늘 곁에 있는 동반자로 살고 있는 것 같다. 매일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가 특별히 짜릿하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듯이. 하지만 그윽한 그 향기와 솔솔 피어오르는 연무를 보면서 매번 안온한 생각의 늪에 침잠하듯 나의 결혼 생활도 마치 모닝커피처럼 늘 곁에 반드시 있어야하는 존재였으면 한다.
돌이켜 보건데 지난 25년 살아오면서 느닷없이 불쑥 내뱉는 남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외로운 이국 삶에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생활의 원동력이 되어왔는지 모른다. 그런 나는 관연 남편에게 같은 말이라도 한 번 더 생각하고 말을 했던가? 그러면서 부부사이에도 가능한 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말처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언어에 있어서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모닝커피 한잔을 마시며 나의 결혼 생활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던 것 같다. 결국 부부관계란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말 한마디로 인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오묘한 관계라는 결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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