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살 때였어. 동네 어른들이 태극기를 들고 발안 장터로 몰려가셨지. ‘조선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 터져라 부르셨대. 그리고 몇 사람이 일본순사 칼과 총에 맞아 죽고 다쳤다잖아. 얼마 후에는 그 근처 제암리 예배당에 불을 질러 여러 명이 끔찍하게 죽었어.”
어릴 때 어머님에게 들은 기미 만세운동 이야기였다. 그후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매년 삼일절 기념행사가 있었다. 아직 겨울 끝자락이라 발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삼일절 행사는 무척이나 길고 길었다.
그 긴 긴 순서 가운데 가장 긴 것이 바로 독립선언문 낭독이었다. 바람에 긴 수염을 휘휘 날리는 할아버지가 단 위에 올라가서 늘어진 목소리로 읽었다. 그런데 그분 표정이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지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다.
고등학교 국어교사 시절에는 그 ‘기미 독립선언문’을 해맑은 눈동자들에게 가르쳤다. 대학입학시험에 가장 자주 출제되는 문장이기 때문에 철저히 가르쳤다. 듣도 보도 못하던 한문 숙어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라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삼일절을 앞두고 빛바랜 고등학교 교과서를 꺼내 몇 번 읽었다. 특히 현 일본정부가 밉살스럽게 구는 때라 더 읽고 싶었다.
그런데 기미 독립선언문에는 일본을 저주하는 문구가 거의 없다는 점에 새삼 눈이 갔다. “일본의 무신(신의 없음)을 죄하려 아니 하노라.” “일본의 소의(의롭지 못함)함을 책하려 아니 하노라.” 그처럼 관대한 수준이다. 그리고 맨 끝에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는 우리 민족에게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달려나감)하지 말라”고 행동지침을 공약하고 있다.
조선독립운동은 우리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이 목적이지 일본을 파괴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천명한다. 따라서 기미독립운동을 ‘비폭력 무저항주의’ 정신에 입각한 민족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해서 손색이 없다.
이것은 삼일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서’와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삼일 만세사건 20여일 전에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던 독립운동 집회에서도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춘원 이광수가 초안했다는 이 독립선언서에는 만약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 때에는 “오족은 (우리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선포)하리라”고 협박하고 있다. 이광수와 쌍벽의 인물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기미 독립선언문의 비폭력적 무저항주의와 달리 ‘혈전적 쟁취주의’의 늠름함이 흐르고 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 폭력적 혁명 전략과 비폭력적 무저항 방법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이냐는 출구가 없는 논쟁에 속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폭력적 수단만 고집했던 공산주의 혁명이 결국 1억명의 생명을 죽이고도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삼일운동과 기미 독립선언문이 훨씬 더 미래를 내다보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기미 독립선언문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보다 한층 더 높은 고차원의 진리를 담아 놓았다. 바로 함생 정신이다. 선언문 전체에 함생 곧 함께 살아가자는 정신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대한독립운동은 곧 한국도 살리고, 일본도 살리고, 중국도 살리고, 그리하여 전 세계를 살리는 운동을 지향한다고 선언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 동아시아 지역이 19세기 말의 전운이 감돈다는 키신저 박사의 지적처럼 급박한 상황이다. 함생 정신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기초와 비전이 되어야 한다.
기미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우리가 사는 미국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삼일운동은 윌슨대통령의 세계 제1차 대전 후속조치로 제시된 14개 조항 선언에서 사상적 기초를 제공받았다. 평화의 세계 건설, 자유무역, 군비축소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핵심은 글로벌리즘과 함께 약소국가들의 민족자결주의 정신인데 그것이 바로 삼일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또 다른 ‘우리나라’인 미국이 온 세계를 살려내는 더 좋은 나라가 되도록 우리들도 무엇 한 가지씩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삼일절을 맞는 정신적 자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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