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전 신문사에 원고 하나를 보내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원고 사본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서둘러 보냈던 터라 혹 철자의 오류는 없는가 하는 뜻 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설마 이번에야 하면서 읽어 나가고 있는데 ‘추이 (寒)’의 어감이 좀 이상해서 국어사전을 펴보니 ‘추위로 표기해야 맞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지난 겨울 가까운 친지 한 분이 내가 철자법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부산대학교 전기공학과에서 개발한 최신 한글 철자법 소프트웨어를 나의 컴퓨터에 입력시켜 주었기에 믿거라 하고 해당 원고를 찍어 나갔다.‘추이’라는 말에는 아무런 빨간 줄의 경고 신호를 보내 주지 않았었다. 추측 컨데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결코 사람(human)이 아닌 이상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이(推移)라는 말에 아무런 하자가 없음으로 무사 통과 시킨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한글 기초교육을 받지 못한 멸종위기에 선 세대라 부르고 있다. 내가 중학교 과정을 밟고 있던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 했다는 것을 알고 맨 먼저 한 것은 나의 교복에서 일본이름의 명찰을 찢어 버리는 것 이었다. 무더웠던 그날 오후 나는 하숙집 단칸방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흥분에 뒤섞인 깊은 상념에 젖어 들었다.‘아까자끼’ 선생과의 아쉬운 이별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분과 나는 국적을 넘어선 사제지간의 정으로 하이꾸를 특별지도 해줬던 이름 있는 시인이었다.
못지않게 아쉬웠던 것은 바로 지난주 일본신문에서 읽은 가야마 미쓰로(이광수)씨의 조선 출신 학도병의 출정(出征) 축하 글이었다. 4년을 끈 오랜 전쟁의 궁핍을 참지 못해 지조를 굽히고 친일 행각을 하였다는 슬픈 현실 때문이었다. 일어로 쓴 그의 문장은 유려하였고 수려하여 많은 조선 출신 젊은 학도병들에게 피 끓는 감동을 주었었다. 몇몇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 정책을 찬양 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는 대가로 특별 식량 배급을 받고 있었다. 10월에 들어 속성 한글 강습소가 생겼다는 소식이 와서 등록을 했다.‘한국어는 매우 쉬운 글이니 소리 나는 대로 글로 쓰면 될 것이다’라는 종강 때의 말은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다.
이북이 고향인 나는 서울에서 혈혈단신 힘겨운 대학 생활을 끝내고 1954년 4월 새로 개편된 중고등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했다. 대학 과정을 통하여 나의 머리 속에는 영어, 일어, 한문 그리고 몇 개의 제 2외국어 들이 둥지를 튼 가운데 새로 맞이한 한글은 어쩌면 뒷전으로 밀려진 채 교단에 선 나는 “To be”의 존재적 해석을 ‘이씀니다, 잇음니다, 있음니다, 있습니다’ 등 소리 나는 대로 칠판에 써나가고 있었다. 색 바랜 나의 자화상의 부끄러운 편린 이다.
13년의 교직 생활을 접고 미국에 이민 온 것이 1967년, 다시 한번 바뀐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한글에 소원했던 나에게 한글세계로 돌아오게 하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1994년 워싱턴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지부가 생기고 이 운동 홍보의 목적으로 미디어의 협조가 필요했을 때 이에 동참하고 귀중한 지면을 쪼개 기윤실 칼럼까지 설치해준 것은 다름 아닌 한국일보였다. 펜으로 써서 보낸 원고는 산뜻한 활자에다 잉크 냄새가 아직도 가시기 전인 다음 날 아침이면 각 구독자 가정에 배달되었다. 활자로 된 나의 글을 읽는 흥분의 와중에서 뜻밖에도 틀린 철자를 바로 잡아 준 흔적이 여러 곳에 있음을 발견했다. 늦게나마, 지면을 빌어 나의 졸문을 다듬고 가꾸어 준 편집부 기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철자의 오류는 한글이든 영어든 자기를 드러내는 바로미터이니 한 자의 실수라도 첫 면접에선 이미 많은 감점을 받았을 것이다. 철자법 해결의 왕도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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