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4년 작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한다. 설정이 비슷하다. ‘포레스트 검프’는 미국 현대사의 주요 현장을 직접 경험한 포레스트 검프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국제시장’ 역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덕수’(황정민)라는 남자의 인생을 그린다. 한 국가의 역사를 특정 인물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그 삶에 메시지를 담는 형식이 닮았다.
‘포레스트 검프’의 처음과 마지막신에 등장하는 깃털을 나비로 대체한 설정처럼 노골적인(혹은 무의식적인) 인용에서도 ‘포레스트 검프’의 영향을 느낄 수 있지만 이것이 핵심은 아니다. 이 정도 클리셰는 상호복제에 관용적인 장르적 특성으로 볼 수도 있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국제시장’ 이덕수의 개인사에 파란만장한 한국사를 투영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하는가 하는 점이다.
‘포레스트 검프’를 인간승리 드라마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 속에는 국수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 상을 거머쥐었지만 평단의 야유를 받은것은 그 때문이다. ‘국제시장’은 어떤가. 덕수나 감독에게 정치적 야욕은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승리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대중이 이 영화를 반드시 보게 하겠다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감춰둬야 할, 의지가 읽힌다.
어린 덕수는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 때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을 잃고 부산으로 온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수입품 가게를 하는 고모댁에 얹혀살게 된 그는 ‘앞으로 네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 어린시절부터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독일에 광부로 파견을 갔다 오고 돈을 벌기 위해 다시 베트남으로 간다. 덕수는 그렇게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
윤제균 감독의 성공방정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코미디와 감동을 섞은 말랑말랑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윤제균류(流)의 연출기법은 ‘해운대’(2009)에서 빛을 봐 한국 재난 영화의 지평을 열었다. ‘색즉시공’(2002)은 섹스코미디의 첫 시도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의 영화는 완성도를 떠나 관객을 궁금하게 한다. 이 궁금증은 흥행 성공으로 이어졌다.
‘국제시장’에선 이런 새로운 연출시도가 눈에 띄지 않는다. 윤 감독은 보통명사이자 고유명사인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정작 그 ‘아버지의 서사’가 빈약하다.
‘아버지’에 대한 이 영화의 해석은 중층적이지 못하고 단선적이다. 영화는 ‘우리네 아버지들은 죽을만큼 고생했다.’는 지점에서 멈춰 제자리 뛰기를 한다. 이 자명한 이야기를 두 시간 넘게 끌고 가려면 풍부한 에피소드가 받쳐줘야 한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들이 동원된다. 흥남 철수, 부산 피난, 서독 광부파견, 베트남 전쟁 민간 기술자 파견, 이산가족 찾기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교과서적인 나열이 그것이다.
‘포레스트 검프’는 정치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미국 현대사와 그 과정을 견뎌낸 개인을 하나의 역사로 묶어내는 데 성공해 평가를 받았다. ‘국제시장’은 ‘피와 눈물의 역사’를 ‘에피소드’로 불러낸다.
게다가 이 에피소드들은 덕수를 최대한 괴롭히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흥남 철수 때 덕수는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있던 동생을 놓친다.
이것이 평생 덕수의 트라우마가 된다. 공부 잘하는 동생의 학비를 대려고 서독광부가 되고, 때마침 광산이 무너지는데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다. 이번엔 여동생이 결혼비용 문제로 말썽을 부리고 덕수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터로 간다. 때마침 폭탄이 터진다. 이산가족 찾기 에피소드 역시 잘 준비된 최루탄(눈물폭탄)이다.
한 개인의 고생담에 초점이 맞춰지는 바람에 이야기와 캐릭터가 주변으로 밀린 감이 있다. 서사가 특정 성격의 인물이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는 과정이라면, 이 영화에는 외길로만 가도록 프로그램화된 캐릭터가 많아 행로(서사)가 빤히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황정민의 감동 연기도 울림이 크지 않다. 그는 모든 장면에서 열연하지만, 기계적인 설정이 빛을 바래게 한다. 김윤진은 제대로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름만으로도 공통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상투적이지 않게 그려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유명사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윤제균 감독의 헌사를 폄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관객들에겐 보통명사로 다가올 아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엄마를 부탁해’에서 신경숙이 그린 어머니처럼 아버지 역시 보통 자식들이 그리는 뻔한 이미지를 뛰어넘는 복잡한 존재일 것이다.
관객들이 흘릴 눈물은 아버지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헤쳐온 숱한 시련에 대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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