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시위를 떠난 화살, 한번 찾아온 기회, 흐르는 시냇물, 돌아가신 부모님에게의 효도…그리고 입에서 튀어 나온 말 또한 그렇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쓰고 있는 말의 원천은 피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자랐으며 날개를 치면서 입술과 입을 통해 비상하여 넓게 멀리 퍼져 나갈 수 있다. 그 내용이 “소문에 의하면” 하고 전해지기도 한다.
한인들이 밀집한 LA에서도 그렇게 전해지는, 날개 달린 듯 떠도는 말들이 많아 그로 인해 숱한 오해와 분노를 야기 시켜 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 LA에서는 “식사할 때 말고는 입을 벌리지 말라” 즉 남의 말을 삼가라는 농담 같은 충고도 있다.
칼의 베인 상처는 쉽게 아물지만 혀에 베인 상처는 영원히 가슴 깊숙이 남는다. 되도록 말을 삼가는 게 현명하겠지만 직업상으로 부득이 많은 말을 해야 되는 사람들도 있다. 방송인, 언론인, 목사, 교사, 그리고 의사 등이다. 의사 중에선 특히 정신과와 내과 의사가 환자에게 많은 말을 하게 되고 또 듣기도 한다.
내과 의사로서, 또한 주치의라는 직업상의 이유로, 피하고 싶은 말이지만 환자에게 어쩔 수 없이 전해야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환자의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암과 불구, 임박한 생명의 기간 등의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실을 제일 먼저 알리고 위로하고 충고하며 대처 방안도 마련해주어야 한다.
위험의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알려주어야 진단과 필요를 위해 꼭 필요한 검사를 할 수 있다. 그들이 부딪친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려 깊은 말로 시작하여야 좋을지 몰라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한다.
환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알게 되면 좌절과 고통이 가중되는 환자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가족과 먼저 상의한 후 환자에게는 상황을 숨기는 경우도 생긴다. 감각의 허탈 상태가 되는 사람, 가능성의 말만으로도 자기 혼자 확진을 해버리고 자리에 누워 버리는 사람. 그 후 검사 등으로 병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하기 보다는 의사가 쓸데없이 힘든 시간과 재정적 부담을 주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간혹 본다. 그러나 검사가 왜 필요한지 병의 가능성을 전혀 설명해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각자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인간의 마음에는 한 순간에도 수 만 가지의 생각이 바람처럼 사방에서 불어 대는데 부족한 의사로서는 그 바람 같은 생각들을 항상 하나로 묶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침묵으로 일관할 수도 없다. 의사의 말 한 마디 한마디가 환자들의 심신에 미치는 의미와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알기 때문이다.
“말을 잘하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온다”고 한다. “우리는 각자 입안에 도끼를 한 개씩 가지고 있으며 이 도끼를 잘못 쓰면 남을 아프게 할 수 있지만 제대로 쓰면 남의 아픔을 잘라주게 된다”는 법정스님의 말씀도 항상 마음에 담아 둔다.
주치의로서, 내과의로서 많은 말을 하게 되지만 어느 경우에나 딱 들어맞는 공식으로 정해진 말의 틀은 없다. 도끼를 아끼고 안 쓸 위치도 아니다. 상황에 맞게 상대편의 형편과 마음을 헤아리면서 말을 하게 된다. 단지 “도끼를 제대로 쓰면 남의 아픔을 잘라주게 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보호자와 환자의 마음을 사려 깊게 헤아려야 하는 원칙은 명심하려고 할 뿐이다.
그리하여 아픔이 조금이나마 잘라지고 더 나아 가서는 언제나 두부를 사가지고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의학 지식에 의한 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말로도 커다란 혜택과 마음의 평안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같이 아프게 되는 환자에겐 치료 한 부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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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청원 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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