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 ” 어머니의 말끝이 흐려지며 힘이 없다.“경철이네 집에 가서 쌀 한말만 외상으로 받아 오너라.” 순간 한줄기 식은땀이 흐른다.“엄마가 이야기 잘 해놓았으니 주실 거야, 얼른 다녀오너라.”70년대 초 이웃동네에 시골서 올라온 총각형제가 석유가게를 열었다. 땅에다 묻은 큰 독에 석유를 채워놓고 손님들이 직접 됫박으로 퍼 담아가는 방식으로 석유장사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한구석에서 쌀도 함께 팔기 시작했다. 쌀과 석유는 함께 팔기에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불을 붙일 때마다 매캐한 냄새로 얼굴을 찌푸려야 했던 석유곤로에 마침 석유가 떨어져 어머니가 한되 사러 갔을 때, 가게 주인이 석유 한 방울밖에 안 떨어진 쌀을 반값에 판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그 쌀 한말을 사와 밥을 지으셨다. 그러나 다된 밥에서는 석유냄새가 역하게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밥 한 솥과 남은 쌀을 다 버리고 더 이상 양식이 없게 된 어머니가 궁여지책으로 내게 말씀하신 거였다.
“아, 정말! 경철이는 우리 반 친군데 어떻게 창피하게 그 집에 가서 외상으로 쌀을 달라고 그래요? 내는 못 갑니더.”볼멘소리로 투덜거려 보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 거절당할 것을 상상하면서 친구네 쌀집으로 가는 것은 무척 고통스런 일이었다.
산동네에 있던 우리 집은 군용 더플 백을 쌀자루로 썼었다. 두말 정도를 가득 담아 팽팽하게 서있는 쌀자루를 보면 흐뭇했다가도, 매일 조금씩 줄어들다가 어머니가 얼마 안남은 쌀을 바닥을 긁으며 푸실 때면 온갖 걱정을 혼자 짊어진 듯 시무룩해지곤 했었다.
집에서 언덕길을 한참 내려가면 큰길가에 쓰레기 하치장이 있고 그 길 건너에 경철이네 쌀집이 있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모기만한 소리로 땅바닥만 내려 보며 경철이 아버지에게 엄마의 부탁을 전했다.
친구 아버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멍석에 가득 쌓여 있던 쌀을 듬뿍 퍼서는 한말짜리 둥근 말 통에 쌀을 수북이 담는다. 그러고는 나무 봉으로 넘치게 쌓인 쌀을 쓱 깎아 내시다가는 인정스레 중간에서 그대로 멈췄다.
쌀을 노란색 종이봉투에 담고서는 아무 말도 안하시고 그냥 건네주시면, 잔뜩 기가 죽어있던 나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경철이네 집은 동네 유일의 쌀집으로, 없는 집들에게 외상 인심도 좋았고, 제 때 갚지 못하는 집에 찾아가서 인상 찌푸리는 일도 없이 늘 이웃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어 지금도 그 친구네 집을 생각하면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15년 전 9.11 사태 직후 북가주 한인은행에 취업하기 위해 태평양 건너 이민을 왔다. 지금은 부동산과 금융 전문인으로 일하면서 지구촌 정보혁명의 최고 중심지인 실리콘밸리에 정착해 살고 있다. 어릴 적 살던 고국의 산동네와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미국 최고의 부촌이다. 이따금 글로벌 IT 기업 총수나 고위 임원, 고소득 엔지니어, 벤처 투자가 등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수천만 달러 저택 심지어는 1억 달러를 호가하는 초호화 주택들의 내부를 직업상 둘러보기도 한다.
과거보다는 훨씬 잘 살고 있지만 상대적 박탈감으로 가진 자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고 계층 간 갈등이 깊은 지금의 고국과는 달리, 미국의 이 동네는 엄청난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각자의 분수대로 만족하며 사는 듯, 매우 평화롭다.
그러면서 때로 궁금해진다. 높은 담에 둘러싸여 끼리끼리 만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이곳 실리콘밸리의 부유층도 40여 년 전 내가 고국에서 체험한 것처럼,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주변의 불우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지, 그들이 도움을 청할 때 따뜻하게 배려를 하며 사는지 가끔 궁금해진다.
모두가 어려웠던 가운데에서도 이웃들에게 서로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살던 고국에서의 70년대, 그 때 그 시절이 문득 많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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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중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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