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기고되었던 정다운 선생의 글이 하도 열화와 같은 성원을 얻었기에, 그 글에 숟가락 하나 얹어보려 한다. 서두에 나왔던 흰 수염 할아버지를 기억하시는지. 긴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잤는지 꺼내고 잤던지 실험해 보느라 밤을 새웠던 할아버지 말이다. 일상적으로 하던 행동은 왠지 맘먹고 기억하려 하면 오히려 기억나지 않는다. 양말 하나를 신더라도 내가 오른발 먼저 신는지 왼발 먼저 신는지 기억나시는가. 티셔츠를 입을 땐 목부터 입을까 팔부터 꿸까.
여기까지 읽다가 문득 입고 있는 셔츠를 벗어볼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굳이 옷을 벗을 필요 없이 문 앞으로 다가가 생각해 보라. 나는 주로 오른손으로 문을 열까 왼손으로 문을 열까. 문을 닫을 때는 등위로 손을 돌려 닫을까 몸을 돌려 문을 닫고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려 걸어갈까. 이만큼만 생각해도 머리 아픈데, 내 일 아닌 남의 일에 “고깃집에서 내가 쌈을 먹을 때 쌈장을 바르고 고기를 얹는지 아니면 고기부터 얹고 쌈장을 바르는지” 기억해 내는 어느 남자에 대한 노래에 이르면 “그만해!” 머리를 쥐어 잡고 싶어진다.
매일 일상적으로 하던 행동을 정색하고 하려 하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사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는 에너지 절약정신이 탁월해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에 쓰이는 신경세포들이 빨리 이어지도록 아예 길을 내어놓는다. 그래서 우리가 ‘자, 양말을 신어야 하니 오른발을 내밀어 볼까’라고 의식적으로 뇌에 명령을 내리기 전에, 양말만 보면 벌써 오른발이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뇌의 가소성(Plasticity)’ 이라고 부른다.
뇌의 가소성 덕분에 우리의 하루가 막힘없이 흐르게 되기에 표창장이라도 주고 싶은데, 알고 보면 가소성은 늘 좋기만 한 기능은 아니다. 가소성 때문에 우리에게 ‘습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에너지 절약정신에 투철한 우리의 두뇌에 큰 길이 나면서, 주변에 있는 다른 신경세포들의 기능은 약화되고 느려진다. 그래서 늘 오른손으로 밥을 먹던 사람이 왼손으로 밥을 먹으려 하면 그 일에 숙달되지 못한 신경세포들이 두뇌 안에서 허둥지둥 우왕좌왕 제 역할을 찾지 못한다. 우선 숟가락을 어떤 각도로 기울여야 알맞은 양의 밥이 떠지는 지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두뇌 가소성을 이기고 새로운 습관을 형성할까. 쇼핑몰에만 가면 와플콘 아이스크림에 빠져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의 두뇌 속에는 ‘샤핑몰’과 ‘아이스크림’ 사이에 4차선 대로가 뚫려 있어서 ‘이리로 가면 초고도 비만’ 사인을 아무리 많이 걸어놓아도 왠만해서는 길을 돌리기 쉽지 않다.
가장 좋은 방법은 샤핑몰에 가는 새로운 목표를 향하는 새 길을 내거나 아니면 4차선 도로를 막아서 좁게 만드는 것이다. 우선 몰에 가서 사야할 품목의 리스트를 적은 후, 아이스크림 가게 앞을 지나지 않고 샤핑을 끝낼 수 있는 동선을 짜면 어떨까. 아니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가장 먼 곳에 차를 주차하는 것도 방법이다. 두번째로 아이스크림으로 가는 대로를 막으려면, ‘샤핑몰 가기 전에 간단한 간식 섭취’ 라던가 ‘짙은 향수를 뿌려서 아이스크림 냄새 중화’ 같은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은 어떨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머리 속의 새 대로’를 의식적이고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일상의 위대함은 그것을 반복할 수 있다는 데 있으니, 작은 일에 꾸준히 충성하는 것보다 빠른 길은 없다. 알고 보면 긴 괴로움에서 우리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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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희 상담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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