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지키고 있을 석물을 설치해 놓았으니 영원토록 온갖 혼령들을 질타하면서 보호하리라’.
지난 1659년 작성된 효종대왕 애책문(哀冊文)에는 왕릉 입구에 세워진 석물의 책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인의 형상으로 석조물을 만들어 묘 앞에 세워둔 문인석(文人石)은 예로부터 왕이나 사대부의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문인석은 흔히 무인석(武人石)과 함께 각각 한 쌍씩 마주 보고 세우는데 단지 무덤의 수호자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무덤의 주인에게 경건히 참배하는 듯한 의미도 담고 있다. 사람의 형상을 한 ‘석인’이 현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중국 한나라 때로 이전의 순장풍속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 때 도입된 후 고려 시대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초기에는 대부분 평상복인 공복(公服)을 착용하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양의 조복(朝服) 차림의 문인석이 많이 등장해 시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장경왕후 윤씨가 잠들어 있는 희릉의 문인석은 크기가 319㎝에 달하는 데 반해 숙종의 명릉은 171㎝에 머물러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영조 원릉의 문인석은 규모가 다른 왕릉에 비해 훨씬 작아 평소 검소했던 영조의 유지를 따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릉을 둘러본 이들은 문인석이 왕의 성품이나 분위기와 닮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세조 광릉의 문인석은 어깨가 벌어지고 얼굴을 들어 당당한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눈은 윤곽선으로 표현해 근엄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세자 융릉의 문인석은 사실적인 눈과 입술로 효심이 깊은 정조가 자신의 얼굴을 새겼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연산군의 묘에는 문인석은 있지만 무인석을 따로 두지 않았고 단종의 장릉 역시 문인석만 자리 잡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 세계문화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문인석 한 쌍이 3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제작된 이 문인석들은 1983년 한 독일인이 골동품상으로부터 구입해 반출했다고 한다. 박물관은 출처가 불분명하다며 한국 측에 먼저 조사를 의뢰했다고 한다. 독일이 보여준 대인배의 면모가 돋보이기는 하지만 조상의 소중한 유물을 되찾으려는 한국의 노력이 더욱 필요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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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범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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