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초, 신년회를 할 때 친구가 작은 종이쪽지를 나눠주더니 연말의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다시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12월 말 송년회를 할 때 각자에게 다시 나눠주겠다며.
선뜻 쪽지를 받기는 했지만 무엇을 써야할 지 한참 고심했다. 펜을 괜히 딸깍거리다가 적었다. 석사논문은 다 썼니? 졸업은 무사히 했니? 미국 나갈 준비는 잘 되어 가니?
연말인지도 모르고 연말을 보내고 있었던 어느 날 휴대폰이 드르륵 울렸다. 서로 바빠 만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이건 전해주고 싶었다는 친구의 말. 서툴게 찍힌 내 쪽지 사진. 코끝이 찡해 왔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내가 보내준 메시지와, 잊어버렸을 법도 한데 잊지 않고 전해준 친구가 고마워서.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그 이후로는 새해를 맞을 때 미래의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었다. 연말에 메시지를 받는 기분은 좋았지만, 연초에 나 자신을 받는 이로 하여 메시지를 쓰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쓰겠지만 내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니 멋쩍고 쑥스러웠다.
올해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말이었다. 12월에 학기가 끝나자마자 박사논문 초안을 마무리해야 했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나면 진이 쭉 빠져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는 했다.
닫아버린 커피집과 학교를 바라보며, 왜 연말엔 내가 일할 수 있는 장소들도 다 닫아버리는지 원망하고는 했다. 일하지 말고 가족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라고 다들 닫아버리는 건데,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타지에 사는 나는 갈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연말은 내게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들을 모두 쳐내고 한 숨 쉬고 있을 때 문득 6년 전에 친구가 전해준 쪽지가 생각났다. 그 때처럼 메시지를 썼다면 지금쯤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으려나. 결국 쓰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만, 연초에 나는 연말의 나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었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연초의 나는 연말을 맞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까만 암흑 속을 걸은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모른 채 그냥 걸음을 내딛기에 급급했었다. 그냥 연말의 나라는 게 존재하기를 바랐다. 연말의 나에게 가기까지는 열두 달이 남았는데, 그 한 달 한 달이 헤라클레스의 열두 시련 같았다. 시간이야 가만히 두면 흘러가는 건데도, 시간이 나를 삼켜 버릴까봐 겁났다.
연말의 나는 이 모든 시간들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걸 안다. 열두 달 중 힘들지 않은 달은 없었지만 적어도 헤라클레스의 열두 시련만큼 힘들지는 않았다는 걸 안다. 암흑 속을 쭉 헤매다가도 희미한 출구를 찾을 거라는 것도 안다.
어디서 읽었던 글귀가 있다. Not to spoil the ending for you, but everything is going to be okay (결말을 스포일러하려는 건 아니지만,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연초의 나에게 메시지를 쓴다면 이 글귀를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2020년 연말의 나에게는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 어떤 말을 전해주고 싶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멋쩍음과 쑥스러움을 떨치고 생각해 봐야겠다. 아니면 올해부터는 내가 친구들의 연초와 연말을 이어주는 메신저가 되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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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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