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55에서 출발했던 옷 사이즈가 결혼 후 66, 77로 늘더니 미국에 온 후 88, 99의 고지를 넘어 급기야 100을 찍었다. 통통녀에서 뚱뚱녀 반열에 오르자 빅 사이즈를 파는 남대문시장조차 맞는 옷을 찾는 게 어려웠다. 매년 옷을 사 보내주던 친정 언니가 한마디 던졌다. 99는 여자이기를 포기한 거라고. 뭘 입어도 어울리지 않으니 체형을 가려주는 A 라인 원피스나 고무줄 쫄바지에 긴 박스 티가 교복이 되었다. 어쩌다 맞는 옷을 찾으면 색깔별로 사서 요일별로 입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굴과 손발이 작고 팔다리가 얇아서 그렇게 입으면 누구도 내 허리가 36이란 걸 눈치채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한국 옷에서 미국 옷으로 갈아탔다. 사람도 크고 땅도 넓어서인지 무한대의 플러스 사이즈가 존재했다. 신세계였다. 배 둘레에 맞는 옷을 사서 기장을 줄여 입었다. 편하게 쑥 들어가니 홀쭉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미국인 친구들과 있으면 뚱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잘 먹고 아프지만 말라던 남편의 말에 힘입어 맘껏 먹었다. 미국에는 세계 각국의 맛있는 음식과 과일이 왜 그렇게 많던지 입이 즐거웠다. 맨밥도 맛있었다. 윤기 잘잘 흐르는 갓 한 밥을 주걱으로 뒤적이다 두 주걱쯤 퍼먹는 건 기본이었다. 먹고 종일 앉아서 일을 하니 복부 비만은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엔 척추도 버티기 힘들었는지 내려앉았다. 큰 수술을 받고 나서야 마음을 바꿨다. 배 둘레 햄을 없애야겠다고.
인간승리라고 할 만큼 체중을 감량한 후 옷장 정리를 했다. 살 빠지면 입으려고 사이즈 별로 쌓아 둔 옷들이 나일론 가방마다 꽉 차서 위아래로 울룩불룩 튀어나온 것이 꼭 늘어진 뱃살 같았다. 옷장도 다이어트가 필요했다. 정리하다 유행 안 타는 작은 옷을 몇 개 건졌으니 오래 보관한 보람이 없진 않았다. 큰옷을 집에 두면 다시 입을 일이 생길까 봐 안 쓰는 물건과 함께 굿윌 도네이션 센터에 갖다 주었다. 숨통 트인 옷장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물건을 치우다 마음 불편한 일을 겪었다. 한국에 갔을 때 친척에게서 크로스백을 선물 받았다. 몇 번 쓰던 건데, 새 거니 가지라고 주었다. 미국에 와서 두어 번 들고 다녔는데 많이 들어가지도 않고 불편해서 내내 걸어 두었다. 명품이라니 버릴 수가 없어서 선물로 준비한 여행용 백 팩과 함께 돌려보냈다. 일주일이면 간다던 우편물이 가지 않아 기다리던 차에 내가 부친 가방이 짝퉁이라서 세관에 걸렸다는 통지를 받았다. 친척도 선물 받은 거라 짝퉁인지 몰랐다고 했다. 여러 번의 이메일이 오간 후 그 가방을 파쇄하는 데 동의하는 서류를 제출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반성문 급에 해당하는 사유서를 두 번이나 쓰고 사인해서 스캔해 보내야 했다. 내가 얼마나 추레해 보였으면 그 가방을 주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지인들이 앞에 설 때가 많으니 좋은 거 하나 장만하라고 권유할 때마다 “명품은 사서 뭐 해요. 사람이 명품이면 되죠”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뭔 개소리를 했던 걸까.
괜스레 가만히 있는 남편한테 놀러가면 명품 사달라고 했다가 거절을 당했다. 서운함에 부아가 치밀었다. 짝퉁 가방 때문에 짠했는지, 사달라는 걸 거절한 게 미안했는지 라스베가스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루이비통 자켓을 사주었다. 생전 처음 명품 옷을 입어보았다. 명품을 입었다고 명품이 되진 않았다. 그런데 어깨 뽕이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사이즈가 44였다. 그것도 커서 줄여야 했다. 명품에 다이어트 끝이란 보너스를 받은 것 같아 행복했다.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의 44와 한국의 44는 사이즈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명품 때문에 울고 웃었던 8월이 이렇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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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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