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내가 서울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파견되어 뉴욕에 오게 되었는데 한국인이 많이 사는 플러싱에 거처를 정한 것은 한국에서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같은 회사 주재원들은 모두 회사건물이 있는 뉴저지에 살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인이 많이 살지 않아 내가 뉴저지에 살면 어머니가 불편할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같은 위스테리아 콘도 건물안에서 은혜 할머니를 만나 친구가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우리 가족은 2년 후에 플러싱 유토피아 애브뉴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근처 169가에 사는 혜린이 할머니와도 가깝게 지내시어 은혜 할머니와 함께 세 분이 친하게 지내셨다.
혜린이 할머니는 나의 선배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여러 해가 지나 알게 되었다. 은혜 할머니와 혜린이 할머니가 내가 직장에 가있는 낮에 우리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노시다 가시곤 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주일마다 나와 아내, 어린 두 딸들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4남매를 키우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세상물정에는 밝지 않았으나 그림을 잘 그리셨고 꽃을 좋아하시어 집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뒤뜰에 있는 작은 꽃밭을 보여주기를 즐겨했다.
내가 미국에 온지 2년 후에 전화번호를 알게된 학창 시절 신의교 동기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 창립기념일에 오라고 초청하여,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예배 후 친교실로 이동했다.
친구 부부가 서 있는 곳에 은혜 할머니도 있어 인사하고 나서 친구에게 물어보니 자기 어머니라고 했다. 친구는 은혜 아빠가 동생이라고 했다. 나는 은혜할머니라고만 알았는데 친구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놀랍고 반가웠다.
나중에 동기 동창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을 때 친구는 자신의 어머니를 우리집에 차로 모셔다 드리느라 평일 낮에 왔었다고 했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서 선배님 어머니인 혜린 할머니가 먼저 102세에 돌아가시고, 2년 후에 나의 어머니가 102세에, 친구의 어머니인 은혜 할머니가 103세에 별세하셨다. 친하게 지내신 세 분이 모두 100세 이상 장수하셨다.
몇 해 전에 그 친구가 내 집에 와서 텃밭과 꽃밭을 둘러보더니 이른 봄에 자기 집 꽃밭에 있던 모란들 중에서 두 뭉텅이를 갖다 주었다. 나는 세 그루로 나누어 매일 물을 주고 정성껏 키웠더니 5월 미국의 어머니 날에 흰색 모란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났다. 올해도 흰색 모란꽃들이 피어나 활짝 웃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더운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시인은 ‘모란이 피기 까지는’ 이라는 훌륭한 시를 지었다.
나는 마당에 활짝 피어난 흰색 모란꽃을 보니 정갈하셨던 나의 어머니, 후덕하셨던 친구의 어머니, 인자하셨던 선배님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흰색 모란의 꽃말은 부귀와 번영이라고 한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들께서 이 꽃말처럼 우리들의 마음이 넉넉하고 가족들이 번영하기를 바라고 계시리라 믿는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푸르고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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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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