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부터 일주일간 뉴욕 플러싱의 코리아빌리지에 있는 열린공간에서 백범 김구선생 겨레사랑전을 개최하는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뉴욕지회의 윤영제 회장(76)은 지금처럼 우리 민족이 대립과 분열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때 백범 선생의 애국애족의 정신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백범 선생의 정신을 2세들에게 가르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겨레사랑전을 개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범 김구선생 겨레사랑전은 지난 1999년부터 시작하여 이번이 6번째이다. 서울의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가 소장하고 있는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까지 백범 선생과 관련된 흑백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맨하탄의 브로드웨이에서 전시한 것이 첫번째이다. 그 후 워싱턴 DC와 시카고, 예일대,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각각 전시회를 가졌다. 이번 전시회에는 뉴욕지회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 72장과 백범의 유품, 족자가 전시된다. 또 상해 임시정부가 미주동포를 대상으로 발행했던 국채의 사본, 미주동포들이 10만달러를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보낸 기록, 백범선생이 이름을 지어준 광주시 백화마을(백세대가 화목하게 살라는 뜻)의 이사 광경 등 특별한 자료가 전시된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뉴욕지회는 1997년 3월 윤회장을 비롯한 15명의 회원들로 결성됐다. 윤회장은 이 때부터 회장으로 지회를 이끌어 오고 있다. 윤회장이 이 단체를 하게 된 데는 백범 선생과 그만한 인연이 있다. 해방 후 월남하여 청년단체운동을 하고 있던 윤회장은 1949년 1월 2일경 교장으로 백범 선생을 찾아 인사를 했다. 이 때 백범 선생은 벽장 속에서 백범 일지 1권을 꺼내 친필로 이름을 써 주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당부를 했다.
그 후 몇달이 지나 백범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함으로써 그는 백범에 대한 가슴아픈 추억을 안고 살아왔다. 지난 1996년 그는 김우정 전 광복회장과 이만열 숙대 교수를 뉴욕에 초청하여 백범 김구 사상 대강연회 개최를 주선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의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와 지회설립문제가 논의되었고 기념사업협회 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뉴욕지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해외에 있는 유일한 지회인 뉴욕지회는 겨레사랑전을 개최하는 이외에 매년 백범선생의 기일인 6월 26일에 추모식을 갖고 있으며 서울대 신용하 교수와 강영훈 전 국무총리를 초청하여 강연회도 가졌다. 또 2002년 서울의 백범기념관을 건립할 때 1만여달러의 성금을 모아
전달했고 백범 암살범인 안두희를 죽이고 감옥살이를 한 박기서씨 자녀들의 학자금을 보조하기도 했다.
윤회장은 함남 영흥 출신으로 1947년 3월 농업학교에 다니던 17세 때 조부와 함께 월남했다. 당시 이북에서 월남한 청년들은 대개 반공청년들로 윤회장의 고향 선배들은 대한혁신청년회란 조직을 만들어 반공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청년단에서 합숙생활을 하면서 반공운동에 가담했다. 6.25전쟁이 나자 그는 문관으로 종군하다가 현역으로 입대하여 1957년까지 군생활을 했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1958년 체신부에 들어가 체신노조를 결성할 때 주도적 역할을 하여 초대 사무국장이 되었다. 이어 체신노조위원장이 된 그는 4.19가 난 후에도 재신임을 받아 체신노조위원장을 두번이나 역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한국노총 사무총장과 상임부위원장, 중앙노동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노동운동을 선도한 한국 노동계의 산 증인이며 특히 체신노조에서는 지금도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유신으로 노동운동이 크게 위축된 1974년 그는 미국에 이민, 뉴욕에 정착했다. 그는 한국일보 뉴욕지사의 영업과 사업을 총괄하는 업무국장을 거쳐 라디오방송인 한국방송 사장, 대한TV 사장, 조선일보 뉴욕지사 고문 등을 지냈다. 특히 한국일보 뉴욕지사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코리안 퍼레이드를 창안하여 1980년 신문사 사업으로 퍼레이드를 시작했고 운영난에 빠졌던 뉴욕한인봉사센터 등 한인단체를 돕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6.25참전 유공자인 윤회장은 언제나 반공에 앞장서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여순반란사건 때도 학생계몽대원으로 군부대를 방문하여 북한의 실상과 김일성의 야욕을 깨우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친북좌익세력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태는 그냥 둘 수는 없다고 한다.
칠순이 넘은 그는 아직도 청년처럼 건강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반공을 하자고 외친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마지막 독립군’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자신이 건강을 잘 관리하여 이북에 있는 김일성 동상이 무너지는 날을 보고 그 동상을 밟는 날까지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윤회장은 일부 사람들이 백범 김구선생에 대해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터뜨리게 했다고 백범을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백범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시한 것이므로 테러가 아닌 전쟁 행위라고 했다. 또 백범은 임시정부 주석 시절 중국의 장개석 정부와는 교류했으나 중국공산당과는 교류를 하지 않은 반공주의자라고 했다. 다만 임시정부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일을 하기 위해 좌파도 포용해야 한다는 정책을 취했고 이런 차원에서 해방 후 남북협상을 시도했으나 끝내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민족통일국가의 실현을 이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평생을 공산주의와 싸워왔다는 그는 남은 여생을 한인사회에 백범선생의 정신을 심고 공산주의와 싸우는 일에 바치겠다고 힘있게 말했다.
<이기영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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