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나이에도 불구, 한인 타운의 중심인 플러싱 유니언 스트릿을 매일 말끔히 쓸어 화제가 되고 있는 백봉기(81. 코로나 거주) 할아버지는 소일거리가 없어 시간만 보내는 한인노인들의 삶에 좋은 표본이 되고 있다.
백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4시쯤 일어나 조반을 먹은 후 집에서 5시경 떠나 청소하는 플러싱 거리로 1시간을 걸려 걸어 나온다. 그리고는 보관해둔 창고에서 청소도구를 꺼내 거리를 말끔히 쓸어 나간다.
얼마 전 보도에 소개된 바와 같이 백 노인은 이미 작고한 플러싱 한인회 김창훈 회장의 권고로 2002년도부터 시작했던 이 청소를 오늘까지 4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해오고 있다. 비나 눈 때문에 하기 힘든 날이라 할지라도 백 노인은 반드시 플러싱 유니언 상가까지 가서 그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온다는 것.
친분을 가지고 지내던 김 회장을 따라 환경미화 캠페인에 동참하면서 그 때부터 천직이나 되듯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는데 이제는 마치 플러싱의 환경미화 선봉장이 되다시피 되었다. 처음 얼마간은 무심코 지나가던 한인들 사이에도 이제는 많이 알려지게 되어 ‘청소 할아버지’라 하면 그 일대 한인은 다 알 정도로 낯설지가 않다.
백 노인의 일일 청소 시간은 보통 3시간 반이나 4시간가량인데 요즘같이 낙엽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는 끌어내리고 하다 보면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린다고 한다. 이 일은 처음엔 좀 힘이 들었는데 계속해서 하다 보니 몸에 익어 지금은 힘든 줄도 모르고 청소를 마치면 오히려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라 지나는 사람들이 거리가 말끔하니 기분 좋아하고 잘했다 격려도 해주어 더욱 즐겁다는 것이다.
전에는 이 거리가 상당히 지저분했는데 이제는 자신이 청소하고부터 아주 기분이 좋다는 것. 물론, 한인들 중에는 이를 보고 격려의 눈길을 보내주는 사람도 있지만 개중에는 보면서도 생활이 너무 바빠 나 몰라라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 백 할아버지는 이 청소를 하면서 세상의 인심과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 1년 동안은 한인봉사센터에서 소정의 월급 400달러를 받고 했는데 그 후 1년 동안은 보조금이 끊겨 더 이상 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자신의 정성이 깃든 플러싱의 거리를 그렇다고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년을 그냥 해오던 대로 묵묵히 거리를 청소했다. 이를 안 이 일대 한인상인들이 지난해 8월부터 나서서 십시일반 모아 백 할아버지에게 전과 같은 금액의 돈을 보조해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백 할아버지는 무료 때는 오히려 마음 편하고 좋았는데 상인들로부터 돈을 받으니까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형편이 어려운 가게 경우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옛날 한국에서 경기도 장안면에서 인근 우정면에 사는 한연숙 할머니(75)와 중매로 결혼하여 아직까지 금실 좋게 사는 백봉기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35세에 대한 공론사 내에 있던 코리아 헤럴드 사에 입사, 공무국에서 17년간을 일한 후 정년퇴직했다. 무엇이든 외길을 걸을 만큼 백 할아버지는 성품이 꼿꼿하고 근면 성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에게 책임이 한번 맡겨지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성실하게 해내고 마는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아파도 결근한 적 한번 없어 직장에서 개근상까지 탔다고 한다.
그는 은퇴하고도 집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봉천동에서 복덕방을 99년도까지 하며 집안을 돌보다가 미국에 건너왔다. 부인과 떨어져 산지 10년이 넘은 때였다. 81년 당시 레이건대통령 때 3개월만 있으면 영주권 취득이 가능하다 해서 아내가 먼저 동생의 초청으로 미국에 왔는데 법이 바뀌어 결국 영주권을 10년 넘어 받았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아내가 봐주던 동생의 아이들이 벌써 다 커서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길다보니 아내에게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아내는 그동안 영주권이 없어 오도 가도 못하고 그냥 아이들만 보살피고 있다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백 할아버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크게 불평 없이 가정을 꿋꿋하게 지켜준 아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고 말한다. 자식을 키울 때도 조금도 아이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고 아내는 모
든 걸 다 자신이 감수하며 희생하면서 살았다며 “그런 점이 참 고마울 따름”이라고 덧붙인다.
한국에서는 그런대로 살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그래서 때로는 여러 가지로 편하게 해주려고 하다 보니 의견충돌도 날 때가 있다는 것. 백 할아버지의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늘 편안하고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가정은 모
름지기 여자가 잘 들어와야 평안하다며 그런 점에서 ‘우리 부인이 최고’라며 빙그레 웃어 보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 한연숙 할머니도 “옛날부터 우리는 변함없이 살고 있다”며 “요즘 아이들은 결혼을 했어도 얼마 후 보면 벌써 이혼했다는 소리가 나곤 한다”며 옛날 같이 한번 결
혼하면 꾸준히 살아주면 좋을 텐데 이제는 둘이 좋아라 결혼하고서도 백년해로를 못하고 깨어지는 가정이 많아 겁부터 난다는 것.
백 할아버지는 요즈음 젊은이들한테 “세상의 모든 것이 시끄럽고 문란할 때가 많은데 그럴수록 정직하고 조용하게, 나쁜 짓 하지 말고 깨끗하게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권고한다. 그리고 부모와 같이 사는 젊은이들을 보기가 힘든데 부모를 존경하고 동기간에도 서로 위하고 우애 있게
지내면 좋겠다고 한다.
백 할아버지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고 있는데 큰 아들 도현씨는 퀸즈 푸레쉬 메도우에, 둘째인 외동딸 은혜씨는 시카고에, 셋째와 막내아들은 둘 다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 백 할아버지는 미국에 늦게 오는 바람에 아직까지 정부혜택을 못 받아 현재 부인이 받는 생활보조금으로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것 때문에 때때로 속이 상해 마찰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정부가 해주는 대로 기다리면서 살아야지 하며 마음을 쓸어내린다. 이런 상황에서 백 할아버지가 청소해서 상인들로부터 받는 소정의 월급은 이들 부부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
외모로 볼 때 백 할아버지의 체구는 크지 않은데 몇 시간 씩 거뜬히 청소하는 것을 보면 내강형인 가 보다. ‘건강관리에 관한 질문에 그는 한국에서는 등산, 베드민턴을 줄곧 해왔고 여기서는 매일 아침 걷는 것과 청소, 그리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특히 야채를 즐겨 먹는 편이라고 소개한다. 백 할아버지는 영어를 잘 못하는 게 너무 답답해 공부를 좀 해보지만 기억력이 약해 쉽지가 않다는 것.
건강이 허락하는 한 청소는 계속할 거라며 웃어 보이는 백 할아버지의 꼿꼿한 자태는 세상의 어떤 풍상에도 쓰러지지 않고 살아온 그의 초연한 모습을 엿보게 한다. 오늘도 거리의 온갖 더러움을 묵묵히 쓸어내리는 그의 빗자루에서는 갈수록 혼탁해져가는 뭇 사람들의 마음과 몸의
때도 말끔히 씻어지는 듯하다. 소리없이 해온 백 할아버지의 행적은 점차 사회에 알려져 한인경찰협회 김기수 회장과 잔 리우
시의원, 한창연 전 플러싱 한인회장에 이어 얼마 전에도 뉴욕한인원로자문위원회 임형빈 회장으로부터 봉사상이 수여됐다.
여주영 논설위원(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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