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건강해 보이시네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으로부터 이런 인사를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80대 노인이라면 흐뭇한 기분이 될 것이고, 20대 청년이라면 ‘이 무슨 뜬 금 없는 인사일까’하며 의아할 것이다. 장기간 투병 중이던 환자라면 그 말 한마디에도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기운이 솟을 것이다.
내게 이 이야기를 꺼낸 분은 64세의 멋쟁이 여성이었다. ‘64’라는 숫자와 ‘멋쟁이’라는 단어는 언뜻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요즘 보면 나이를 느낄 수 없는 멋쟁이 60대가 너무 많다.
“동문회에 갔는데 10살쯤 아래 인 후배가 그런 인사를 하는 거예요. 기분이 묘하더군요”
‘나를 노인으로 여기나?’싶은 게 영 기분이 거슬리더라고 했다. 후배로서는 대 선배의‘나이’를 배려한, 어쩌면 아부성 인사였을 텐데 그것이 ‘젊고 팔팔한’ 60대 선배에게는 ‘나이’를 의식하게 만드는 무례가 되고 말았다. 요즘 ‘젊은’ 60대의 역린 - 바로 나이이다.
송년 모임의 계절을 맞아 각 동문회마다 젊은층을 참석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20대, 30대 동문들이 모임에 잘 안 나와서 회비를 깎아 주고, 감투를 씌워주며 유치 작전을 벌인다고 한다.
젊은 층이 동문회를 외면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두가지가 빠지지 않는다. “진행이 중년층 위주여서 재미가 없다”와 “대 선배들 속에 새까만 후배로 앉아있는 게 불편하다”이다. 전자는 세대 차 문제, 후자는 나이의 부담이다.
20여년 전 처음 미국에 와서 ‘참 편하다’싶은 건 나이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20대 여성으로 살아갈 때는 구속이 많았다. 매사에 ‘여자가 무슨…’‘어린 사람이 뭘 안다고…’의 두가지 족쇄가 따라다녀서 본의 아니게 다소곳하고 주눅든 듯 행동해야 할 때가 많았다.
미국에 오니 학생으로서 교수를 만나건, 젊은 여성으로서 아버지뻘 되는 남성을 만나건 대등한 입장에서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꿀맛 같은 해방감이었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전통이 뿌리깊은 우리 문화에서는 나이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처음 만나면 우선 나이부터 서로 확인해서 누가 위이고 아래인가를 정해야 자연스럽게 대화가 풀리는 것이 우리의 오랜 버릇이다.
그 결과 윗사람을 공경하는 좋은 전통이 세워진 것이 순기능이라면, 나이가 벽이 되어서 진정한 만남이 차단되는 역기능이 있다. 예를 들어 어느 20대가 50대를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면 미국인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한인들은 뜨악하게 쳐다본다. 나이라는 틀이 장벽으로 작용해서 세대간의 스스럼없는 만남이 우리 문화에서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후배들은 대 선배들 틈에 들어가기가 부담스럽고, 선배들은 자신을 노인 취급하는 후배들의 무신경이 섭섭한 동문회의 풍경도 같은 맥락이다. 동문회 모임은 20대부터 80대까지 각 연령층이 다 모이는 ‘나이 전시장’. 우리의 나이 문화가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다.
동문회 모임에서 ‘나이’를 걸러내면 좋겠다. 나이를 뛰어넘는 만남의 기회로 삼아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별로 테이블을 정하는 관행부터 버려야 하겠다.
역시 60대인 한 부부도 올해는 동문회 모임에 갈지 말지 생각 중이다. 모임에 가봐야 “아유, 선배님 오셨네요. 이리로 앉으세요”하며 ‘상석’에 앉게 하고는 행사는 젊은 세대끼리 진행하니 소외감만 느끼고 온다는 것이다.
젊은 후배부터 대 선배까지 나이를 불문하고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경험담을 나눈다면 동문회 모임은 얼마나 유익한 모임이 될 것인가.
나이가 장벽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표현에서부터 나이를 걸러내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참고로 ‘젊은’60대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곱게 늙으셨네요”“아유, 그 연세에, 대단하시네요”등. “나이 든걸 꼭 그렇게 아프게 찔러야 하느냐”며 서글퍼한다. “고우시네요”“정말 대단하시네요”면 의사전달이 충분한 것을.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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