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는 반쪽 계절만을 갖고 있다. 봄과 여름은 있는 것 같은데 가을과 겨울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사계절이 분명치 않은 것이다. 겨울철이라 해도 온도가 좀 내려가고 아침저녁 쌀쌀한 기운을 느낄 뿐이지 견딜만한 날씨이다.
계절을 즐기거나 여유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흡족치 못할 수 있겠으나 추운 것이 싫어지는 노인들과 넉넉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한국에서 가을과 겨울을 겪은 이민세대들은 고향이 생각나듯 문득 문득 계절에 대한 그리움에 빠질 때가 있다. 그나마 주변에 높은 산들이 있어서 설경을 볼 수 있으며 스키도 즐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뭐니뭐니해도 이곳에서 제일 아쉬운 점은 가을의 전령사인 단풍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설악산과 내장산 같이 짙고 아기자기한 색상의 단풍이나 미국 동북부 지방처럼 온 천지를 꽉 채우고 끝없이 전개되는 웅장한 그런 단풍들을 이곳에서는 감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아열대성 기후의 남캘리포니아는 상록수가 많은 탓으로 비록 단풍 군락지는 없다 할지라도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단풍을 발견할 수가 있다. 가을이 없는 것이 아니고 다만 늦게 찾아오기 때문에 11월 하순이 돼서야 나뭇잎들이 본격적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건물이 많은 다운타운은 몰라도 필자가 살고 있는 밸리 지역에서는 차를 운전 하다보면 곳곳에 한 그루 또는 몇 그루씩 멋진 단풍들로 치장된 가로수들이 있다. 한인 샤핑센터가 있어 자주 지나다니는‘화이트 오크’길이 그랬다. 며칠 전 내린 비로 단풍은 더욱 선명한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한 때 울울창창하던 나무였으나 무상한 세월 속에 붉게, 노랗게 혹은 갈색으로 산화되어버린 단풍은 마치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나 한해의 끝머리에 달려 있는 12월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단풍은 그 나무의 생명과 역사를 그대로 담은 성적표인 것이다.
금년도 몇 날 지나면 끝이다. 이 얼마 남지 않은 12월을 잘 갈무리해서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인가 아니면 무의미하게 닥치는 대로 보낼 것인가는 각자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인생의 최종 시기를 단풍처럼 예쁘게 장식할 것인가 아니면 멋없이 누렇게 퇴색된 잎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오로지 당사자들에게 달려 있다.
인생의 마지막 부분인 노년기나 12월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여명이다. 단풍 밑자리에는 새움이 숨어 있고 다 마친 12월31일 다음날은 새해의 첫 달력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에게는 잘 먹고 멋있게 차려입고 젊고 아름답게 꾸미는 작업도 필요하겠지만 그 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길, 즉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한 가치라 할 것이다.
단풍은 하루아침에 그토록 아름답게 된 것은 아니다. 잎이 푸르고 싱싱할 때부터 출발해서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마침내 극치미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12월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의 달이다. 12월을 아름답게 마감하려면 그 시작부터 좋아야 하겠지만 비록 며칠 남지 않았다 해도 멋진 1년으로 전환시킬 방도가 있다. 지나온 삶이 설사 심하게 얼룩지고 살아갈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인생 전부를 빛나게 만들 길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리고 호화스런 장식들로 세상이 밝아진 이 순간에도 우리 이웃에는 힘없고 가난하고 병약한 형제들이 아직도 너무 많은데 그들을 찾아가 마음과 몸으로 단풍나무를 세워주는 일이다.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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