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주유소에서 개스를 넣으려다 갤런 당 5달러가 다 되가는 개스 값을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언제 이렇게 올랐지? 3달러를 넘어섰다며 언론에서 매일 같이 대서특필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달러를 훌쩍 넘어 한동안 내 지갑 한구석을 얌전히 지키고 있던 비상금마저 동이 나고 말았다.
사실 몰랐던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개스를 넣는 나로서는 값을 몰랐다기 보다 송충이 솔잎 먹듯 매주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상승곡선을 타온 가격에 어느덧 익숙해졌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가 하면 집에서 어바인까지 매일 80마일을 운전하는 남편은 하늘로 치솟은 개스 값 덕분에 프리웨이 트래픽이 많이 한산해졌다고 좋아하는 분위기이다. 왕복 두시간 반이나 걸리던 출퇴근 시간이 두시간 이내로 줄었다는 것이다. 하긴 남편처럼 빛나는 청춘을 프리웨이에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언제 끼어들지 모를 옆 레인의 다른 차와 신경전을 벌이며 보내는 것 보다 한달에 2-300 달러를 더 쓰더라도 30분이나마 제 정신으로 보낼 수 있는 편을 택하겠다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세일 품목을 찾아 마켓을 뒤지고, 조금이라도 더 싼 곳을 찾아 발품을 팔며 굳세게 살아왔던 나에게는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개스비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하여 가계부를 한번 써 본적도 없던 내가 급기야 빨간 펜을 들고 한달에 들어가는 지출을 종목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하 이럴 수가! 맞벌이를 하는 관계로 외식이 잦은 건 알고 있었지만, 고정비를 제외한 우리 가계의 엥겔지수는 거의 개발도상국 수준이었다. 하긴 둘 다 점심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는 편이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만 사실 확인이 된 이상 그대로 있을 순 없었다. 점심시간에 사람을 자주 만나는 나는 놔두고라도 남편의 도시락은 직접 싸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오늘은 또 무슨 반찬을 싸야 하나 매일 고민이다. 영양을 생각 안 할 수가 없고, 어제 싼 반찬을 또 싸는 것도 미안하다. 그래서 한동안 구석에 박혀있던 ‘남편에게 이쁨 받는 요리백과’ 같은 책을 들고 점점 더 다양한 반찬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전날 남은 음식을 대충 데워서 싸주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비교적 몸에 좋은 음식 먹으면서, 팁까지 합치면 10달러가 기본인 점심값도 아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이다. 첨엔 한두번 저러다 말겠지 하며 미심쩍어 하던 남편도 요즘엔 퇴근 전에 전화해서 오늘 저녁 메뉴는 뭐냐고 물어보는 등, 점점 기대가 커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깨끗이 비워진 도시락 통을 보는 재미보다도, 점심시간이 기다려진다는 아부성 발언을 듣는 재미보다도 더 자랑스러운 건 내 손으로 내 식구의 건강을 지킨다는 사실이다. 결혼 생활 몇 년 만에 생긴 기특한 책임감 때문인지 매일 아침 몇분 일찍 일어나는 것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고,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건가 생전 궁금하지 않았던 것에도 신경이 쓰여 지기 시작한다.
개스 값, 이대로 계속 올라간다면 정말 큰일이지만 ‘한 달 뒤면 개스 값 절반!’이라는 희소식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으니 한동안 도시락 싸기는 계속 될 것 같다.
이 기회에 나도 다른 주부들처럼 김치도 담가보고 삼계탕도 끓여 볼까. 아니 요 며칠 야근하고 입 주위가 부르튼 남편을 위해 오늘 저녁엔 비타민이 풍부한 가지 무침을 해야겠다.
지니 조
힐리오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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