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90년대말 한인상권 전성기
초창기 가발업체 주로 포진…70년대 중반 가방.잡화.주얼리등 뒤이어
80년대들어 상가확대되면서 고객층도 다양해져
1978년 16개 도매업체 모여 ‘상인번영회’ 결성…2년후 ‘경협’ 개칭
▲최초의 브로드웨이 상가 입주자 김형기
▲경협출신 뉴욕한인회장 조병창
한때 미주한인사회내 도매상가의 대명사로 불렸던 뉴욕 브로드웨이. 한인들이 진출하기 전, 이 지역에는 유태인과 인도계의 도매상가가 한때 자리잡고 있었다. 유태인들은 주로 모자, 가죽가방, 의류 등을 취급했고 인도계는 카펫, 의류, 주얼리 등을 취급했다. 60년대 말, 70년대초 까지만 해도 이 일대 브르드웨이는 황량했고 여기저기 렌트사인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러던 브로드웨이가 60년대말 한국산 가발경기에 편승한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점차
활기를 띠어갔다. 지상사 등 일부는 고층빌딩의 오피스로 들어갔고 스트릿 사이드 점포가 필요한 업체들은 곳곳에 걸려있던 렌트사인을 내리고 입주했다. 당시 1225빌딩에는 킴스타, WY정, 리치랜드, 로레인, 로크맨 등 가발회사들이 세들어 있어서 가발빌딩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무렵 브로드웨이를 주름잡던 인물들은 김영철, 계원창, 장용호, 박노식, 박정진, 최병철, 이태영, 조
태동, 그레이스리, 김윤철, 박호준, 김해락, 주명중, 신화섭, 송영삼, 나철호, 박찬식, 이창환, 강철희, 찰스김, 대니안, 김차옥 등.
브로드웨이에 점포를 처음으로 낸 한인은 1972년3월 가발 페들러들을 상대로 도매를 하고 있던 KPC(코리언 프로덕트 캄파니)의 김형기. 길가 점포가 필요했던 그가 1201 브로드웨이(29가 코너)에 7백스퀘어 피트 공간에 렌트 650달러로 입주했던 것. 10년후 영원패션과 유토피아가 그 자리를 양분해 들어갔을 때 렌트는 각기 2500달러씩으로 올랐다. 김형기 다음으로 점포를 얻어
비즈니스를 시작한 사람들은 성진의 전효선, 코만 스포츠웨어의 조일환, 유림 트레이딩의 유득종 등이었다. 1974년 가발경기가 쇠퇴하면서 브로드웨이에는 새로운 품목의 상품들이 등장했다. 석유화학 제품인 PVC를 원료로 하는 값싼 인조가죽 가방이 김혁규와 최희용 등에 의해 인기를 끌며 진입했다. 이어서 잡화와 주얼리 품목이 뒤를 따랐다. 변원수, 찰스김, 김동빈, 정수일, 김재설 등이 70년대 중반 브로드웨이 한인상가를 일군 주인공들이었다.
이 지역이 발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교통이었다. 34가 6애비뉴의 지하철 정류장이 뉴욕시 어느 곳이던 닿을 수 있는 거미줄 같은 교통망의 요충이고 이지역이 링컨터널과 미드타운 터널을 잇는 크로스 타운의 직선거리와 맞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32가에서 25가에 이르는 브로드웨이 선상에 한인들의 활기찬 도매시장이 형성되고 프리미엄까지 붙으면서 한해가 다르게 변해갔다. 80년대 접어들어 상가가 비대해 지면서 다변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영역이 점차로 확대되어 브로드웨이 선상을 중심으로 좌위로 스트릿을 타고 넓어지는 형상이었다. 동쪽으로는 5애비뉴와 서쪽으로는 6애비뉴에 이르는 4각형 지대가 한인상가로 확대됐다. 지역도 확장됐지만 고객들의 폭도 그만큼 넓어졌다. 처음에는 뉴욕일원 동포 소매상들이 주고객이었으나 소문이 널리 퍼져 히스패닉, 흑인 소매상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남미 각국 및 아프리카 지역의 보따리 장사들이 몰려들면서 고객의 저변확대를 이루었다. 여기에 길가의 페들러까지 한몫 끼어 브로드웨이 도매상가는 월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오후까지 각처에서 몰려드는 다양한 고객들로 인해 성시를 이루었다.
82년도 당시 브르드웨이를 찾는 소매상들의 분포를 보면 한인 소매상이 전체의 60%, 나머지 40%는 남미 아프리카의 보따리 장사들, 말이 보따리 장사지였지 실제로 그들로서는 무시못할 수입상들이었다. 80년대의 주요 거래상품들은 잡화, 주얼리, 가발, 가방, 의류 등이었으며 선글래스, 전자제품, 헤어 액세서리등도 인기를 끄는 품목이었다. 브로드웨이 한인도매상가의 형성기를 72-3년으로 본다면 2천년대 까지는 존속한 셈이고 이제는 초창기 멤버들이 많이 빠져나갔지만 70년대말 부터 90년대말 까지의 20년이 전성기였다고 볼수 있다. 1백여개소가 훨씬 넘는 점포 소유주들이 한인이었고 김영삼, 김대중 등 한국정치인들도 방문해 점포를 둘러보고 상인들을 격려하던 때가 있었다. 뉴욕을 방문하는 북한 인사들도 브로드웨이 상가를 찾았다.
80년대 8.15 경축행사가 브로드웨이 거리에서 열렸다.
뉴욕한인 경제인협회 창설
브로드웨이 한인상가가 번창해지던 1978년 상인들은 몇 가지 공통과제를 안게 되었다. 연중무휴로 일을 하다보니 건강도 문제가 되고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요휴업 문제와 동일 업종간 과당경쟁, 그리고 업자들간 친목이 필요하게 되었다. 16개 도매업체 대표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 결과 ‘브로드웨이 상인 번영회’를 1978년 4월19일 메트로찰스에서 결성하게 되었다. 협회 창설에 적극성을 보였던 인사들은 찰스김, 이상활, 김혁규, 최희용 등이었고 이들은 초대회장에 킴스타의 김영철을 추대했다. 2대회장 김혁규에 이어 80년에는 3대 최희용 회장을 선출하면서 협회 명칭을 뉴욕한인경제인협회로 개칭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을 이어오면서 경제인협회는 뉴욕한인사회에서 가장 실속있는 직능단체로 발전해 왔다. 협회가 벌인 성공적인 사업 가운데에는 현존하는 브로드웨이 한국학교와 브로드웨이 내셔널 뱅크(BNB)이다.
1986년 설립된 BNB는 한인이 설립한 최초의 연방인가 은행으로서 지금은 뉴욕, 뉴저지에 여러 개의 지점을 설치한 건실한 은행으로 성장했다. 8대를 역임한 조병창 회장은 유일한 경협출신 뉴욕한인회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렌트 높기로 소문난 이 지역을 벗어나 한인도매상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여러 차례 상가이전 운동이 경협 차원에서 펼쳐졌으나 불발로 그쳤고 2000년을
전후해 탈브로드웨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코리아 웨이 … 명물로 떠오른
32가 브로드웨이~5애비뉴
지역 한인상인들 노력 결실
브로드웨이와 5애비뉴를 잇는 32가는 한인도매상가에서 파생된 또 다른 한인 밀집상가가 되었다. 식당, 식품점, 선물센터, 약국, 서점 등이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던 이 거리는 지난 1996년 당시 이영규 경협회장이 뉴욕시와 교섭을 벌여 성공시킨 코리아웨이 현판식을 계기로 뉴욕의 명물이 되고 있다. 브로드웨이와 32가 코너에 코리아 웨이란 거리 표지판을 달게 된 것은 이 지역에서 성공한 한인 상인들의 프라이드였다.
브로드웨이에서는 2천년 이후 한인 상인들이 줄어드는 분위기지만 이후로 32가만은 더욱 번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한 블록에 걸친 한계는 있으나 10여년전 부터 이 일대에 유명 레스토랑, 술집, 노래방, 사우나 등이 집중되면서 밤에는 유흥가의 면모도 보여 미국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류언론으로 부터는 ‘여기서 한국의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펜실베이니아 스테이션으로 부터 동쪽으로 향하는 크로스 타운 보행자들로 항상 인파가 넘치는 이거리가 그 옛날 전성기를 구가하던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의 대를 잇고 있는 것이다.
코리아 웨이 현판식. 우측으로부터 세번째가 이영규 회장. 김경근 대사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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