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나를 원치 않는 곳에 부려놓기라도 한 듯 무심한 세월을 탓해보다가 만만한 하나님을 향해 투정을 부려본다. 한번 지펴진 불만의 불씨는 쉬이 사그러들지 않는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을 털고 일어나 실험대 위에 던져놓았던 안경을 집어 쓰고 반송된 고무 샘플을 향해 손을 뻗쳤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며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실험실 벽시계가 두개로 보이고 샘플을 잡으려던 왼손이 헛손질을 해댔다. 중심을 못 잡고 발을 헛디뎠다. 몸의 중심이 왼쪽으로 옮겨간 느낌이었다. 근무 중에 이게 무슨 변고인가.
‘아! 뇌졸중?’ 뇌 속에 아무렇게나 입력해 두었던 뇌졸중의 초기증상들이 경쟁하듯 앞 다투어 하나둘 뛰쳐나왔다.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증상들이다. 겁이 털컥 났다.
‘건강’은 믿지 못할 상대라고 하더라도 혈압, 콜레스테롤, 혈당에다 체중까지 지극히 정상인 나에게 뇌졸중이 어디 말이나 되는가. ‘건강’이란 놈이 이런 식으로 나의 뒤통수를 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건강’을 위해 섭생과 운동을 할 만큼 해주었으니까. 하나님도 너무하시지 성탄절을 코앞에 두고 선물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런 날벼락을 내리시다니….
최근 한 친구가 뇌졸중 초기증상을 자각하고 지체 없이 차를 몰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 위기를 모면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태연을 가장하며 벌써 몇 분을 지체한 것 같았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인사부에 보고하고 911 신고를 하게 할까? 아니면, 아직은 사지가 말을 듣는 것 같으니 직접 차를 몰고 근처 병원 응급실로 내달릴까?”
30여년 조용히 직장생활을 해오다 은퇴를 앞두고 한바탕 큰 소동을 피워야 한다는 게 내 마음을 짓눌렀다. 2년쯤 더 일하고 회사를 떠날 작정이었는데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게 뻔하다. 그나저나 뭉그적거리다 촌각을 다투는 치료의 적기를 놓쳐 큰 불행을 자초하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반신불수가 된 나의 흉측한 모습도 그려졌다.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당황해하는 나의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우선 내 몰골이나 한번 들여다보고 일을 벌이고 싶었다. 실험실 싱크대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거울에 내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눈의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거울에 바싹 다가섰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나타났다. 마음에 안 드는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상하다?’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코앞에 바짝 대고 들여다보았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팽배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왼쪽 안경알이 빠져버렸을 줄이야$ 말이 안경알이지 나의 눈알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실험대 위에서 빠진 안경알을 찾아냈다. 철저한 검증을 거쳐 제출한 우리 회사 제품에 불합격 판정을 내린 외부 실험실의 보고서를 검토하느라 안경을 벗어 실험대 위에 휙 던져놓았었는데 그때 안경알이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일전에도 한번 빠져 곧 끼어 넣은 적이 있었다. 실험 결과에 대한 불만의 불씨가 내 마음 속 메마른 이곳저곳에 옮겨 붙으며 하나님을 원망하다 겪은 5분간의 해프닝이었다. 안경알을 끼우자 잠시 사라졌던 건강이 마술같이 돌아왔다.
잃었던 본전을 되찾은 것이었다. 본전 찾은 것이 이토록 감격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마치 오랜 뇌졸중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된 기분이었다.
이 해프닝은 잠시 감사를 잊고 삼천포로 빠지던 나를 위해 하나님이 다급히 마련하신 성탄 선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깨우치는 방법은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안경알을 잠시 빼내 ‘본전’이 감사의 조건임을 깨닫게 하시다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말씀은 ‘본전에 감사하라’는 말씀이요, ‘현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범사에는 당연히 걱정거리도 끼어있게 마련이다. ‘본전’은 ‘현재’의 또 다른 표현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황시엽 /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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