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일명 ‘프리타’족이 수백만명에 달한다. ‘프리타’란 프리랜서 아르바이터를 줄인 일본식 조어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과 파트타임 등 아르바이트형 직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일본이 지난 20년간 장기불황에 빠지면서 프리타족은 급속히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현실에 대해 체념과 극심한 좌절감을 드러낸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것 자체도 문제지만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의욕상실이다. 오랜 기간 노력을 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게 되면서 점차 신분상승의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되고 저임금 노동자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하류의식’의 고착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방송은 광복절을 맞아 일본사회를 진단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프로그램은 ‘젠야’(前夜)라는 지식인 잡지에 실린 한 프리타의 기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프리타는 저임금 철야 아르바이트를 하며 먹고 사는 젊은이다. 그는 결혼을 포기한 채 굴욕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전쟁이 나기를 바란다는 섬뜩한 발언을 했다. 전쟁이 터져 기존체제가 뒤집어지지 않는 한 현재의 곤고한 처지에서 벗어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일본의 극우화를 걱정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일본의 우경화 밑바탕에는 프리타족의 하류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현실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접은 계층에게는 무언가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하다.
비뚤어진 정치인들은 이런 계층을 어떻게 동원해야 하는지를 꿰뚫고 있다. 아베 같은 극우정치인들은 하류의식에 빠져들고 있는 국민들의 좌절을 인근 나라들에 대한 적개심과 배타적 국수주의를 확산시키는데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하류의식은 이제 더 이상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하류의식이 날로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지난주 한국소비자원이 발표한 소비생활 지표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3명 가운데 1명꼴로 자신의 소비생활을 하류층에 속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6년 전 조사에서는 4명에 1명꼴이었다. 이런 추세라면 국민 2명당 1명꼴이 되는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경제적으로 하류층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하류의식을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도 지금보다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음을 다양한 사회조사들은 보여준다.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붕괴되면서 이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의욕붕괴 현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위험 징후가 아닐 수 없다.
경쟁에 따른 낙오는 피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다. 금융시장 붕괴 전까지 세계 경제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 사조는 이런 비극을 가일층 심화시켰다. 세계에서 가장 낙관적인 미국인들조차 ‘아메리칸 드림’에 회의적이 돼 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통적으로 계급이동이 힘든 유럽 국가들보다도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에서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오히려 더 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해 절망하는 불행한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 역시 불행하다. 그리고 불안수준 또한 높아진다.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끊기고 현 처지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면 절망하게 된다.
그런 절망감이 너무 깊어지다 보면 전복을 꿈꾸게 된다. 자포자기는 극우든 극좌든 누군가 불만 지르면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정서이다. 일본의 좌절한 젊은이들이 전쟁을 바라고 있듯 말이다.
이석기 같은 시대착오적인 종북주의를 척결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이런 어리석은 세력이 뿌리는 씨앗이 독버섯처럼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없애는 일이다. 그래서 현명한 나라들일수록 사회적, 심리적 안전망 구축을 통해 구성원들의 불행감과 불안감을 최소화한다. 하지만 이념과 권력을 둘러싼 원색적 싸움에만 매달려 있는 한국의 정치인들에게서 이런 고민의 흔적은 전혀 읽혀지지 않는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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