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한 드라마 속 악역이 화제란 기사를 읽었다. 같은 날 우연히 그 배우를 인터뷰한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됐는데, “악역을 연기해 재미있었다”는 소감을 듣고, ‘드라마는 정말 드라마일 뿐이구나’ 하는 소소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어 악역을 멋지게 소화했다는 그 배우를 위해 몇몇 드라마 속 하이라이트를 뽑아주었는데, 모두 악을 쓰거나 욕을 하거나 폭력을 쓰거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분노하거나 분을 이기지 못해 우는 장면들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실감나는 연기를 했느냐는 질문에 그 배우는 드라마 속 모습과 실제 자신을 혼동하지 말아달라는 장난스런 당부를 덧붙였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악역’의 반의어가 궁금해졌다.
‘악’의 대칭점에 ‘선’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선역’이란 단어를 짐작해볼 수도 있지만, 물론 누구도 그런 단어를 사용하진 않는다. 오히려 악역이 줄기차게 괴롭히는 인물이 대부분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그리고 결국 악역은 어떤 종류로든 파멸을 맞게 된다는 흔한 레퍼토리를 기억해본다면, 그리고 그런 결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감내해야 하는 ‘악역’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가 아니냐는 억지도 부리고 싶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악’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일정한 상황에서 악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긴 하지만, 최종 승부의 승자를 만들고, 승자는 극의 주인공이 되어야한다는 억지스런 설정은 석연찮은 앙금을 남기기 십상이다.
그러면 조심스레 이런 결론을 내려 봐도 되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품위를 잃을 수 없는 우리는, 여의치 않은 상황에 봉착했을 때 불가피하게 탓을 돌릴 누구 혹은 무엇이 필요하게 되며, ‘악역’이라는 것이 때마침 고마운 변명이 되어준다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악역의 반의어는 자기 자신이 되는 거다. 억지일까?
수없이 반복된 역사를 통해 우리는 기존의 지배자를 혁명을 통해 제거한 지배자는 더욱 포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거나 이기는 승부나 투쟁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을 인식한다면, 결국 악역을 이긴 자신은 마냥 선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가정을 저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욕망의 산물이며, 그 욕망이라는 자체가 굳이 선과 악으로 갈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욕망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선과 악을 가를 뿐인데, 이때 지나친 타자성으로 건강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지 말자는 얘기다.
욕망은 반드시 결여감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결여감은 그 어떠한 감정보다 파괴적이며 전투적이다. 이런 우리의 속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누구 혹은 그 무엇과의 충돌도 두려워하거나 피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지나치게 드라마 같고 영화 같다는 비난들을 하곤 한다. 그러면 그것들이 놓쳤다는 진짜 우리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혹 ‘악역’의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애당초 ‘악역’이 우리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면, 이 작은 깨달음 하나로 우리의 큰 적 하나가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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