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과거 농구선수였던 서장훈의 인터뷰를 보았다. 90년대 초반 대단한 팬 층을 형성했던 전설의 연세대 농구팀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코트를 지배하며 경기를 주도했던 거구 서장훈을 최근 예능방송에서 자주 보는 것이 좀 낯설기는 했다.
건성으로 프로그램을 보다 내 눈과 귀가 집중이 되었던 것은 서장훈이 자신의 결벽증에 대해 설명할 때였다. 유난히 깔끔을 떨고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그의 유별난 강박에 대해 “어릴 때는 없었고 선수가 된 후에 생긴 습관이다. 큰일을 앞두고 목욕재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합 때 더 잘 하기 위해서, 잘할 수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 만의 룰을 만들고 지키다 여기에 왔다고, 늘 이기고 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나이가 들고 체력이 한 풀 꺾일수록 강박이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고,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했던 최고 선수의 고백은 뜻밖이었다.
“즐기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고요. 저는 세상에서 그 이야기가 가장 싫어요. 즐겨서 뭐가 되겠어요. 그냥 즐겨서는 최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려서는 농구를 정말 좋아했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고 나서 농구를 즐긴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승리를 얻는 게 스포츠잖아요. 그 승패 내는 걸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즐긴다는 것을 저는 용납하지 못했어요.”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혹하다. 평생이 자신과의 싸움인데 그게 즐겨진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라던 어느 피아니스트의 말이 생각났다. 하루하루의 승패가 자신의 몸값과 평판을 결정하는 전쟁터에서, 고통스러운 자기 훈련을 통해 정상에 올랐던 사람에게 ‘그 일을 즐기라’는 말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격려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자. 천직이고, 가슴을 뛰게 하는 유일한 일터에서도 탑이 되기 위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은 필요조건이 아니던가. 매우 절박하고 절실할 때 간신히 성취되고, 조금이라도 안도하는 순간 도태되고 밀려나는 외로움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자신의 온 힘을 다 짜냈던 기량이 그 정도였다면서 즐겼다면 반에 반도 못했을 거라고 이야기 한 서장훈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며 본인의 진심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코트의 악동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담담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동안 나도 마음이 젖어 들었다. 삶을 허투루 살지 않고 진중하게 자신을 뒤돌아 볼 줄 아는 사람이니 자기반성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최고의 선수였으면서 최고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던 그는 이제 친숙한 방송인으로 거듭났다. 이제는 꿈이 ‘최고의 예능인’이 아닌 ‘예능의 마이너 리거’이기에 드디어 그가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온 것 같아 다행이다. 농구선수 서장훈이 아닌 ‘인간 서장훈’이 걸어갈 제 2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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