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달리 힘들어 보이는 친구를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를 괴롭히고 있는 한 관계에 대해 전해 듣게 됐다.
사건의 발단은 걱정해주는 친구의 말을 오해한 상대의 서운한 말 한마디였다. 연이어 다른 오해들이 줄줄이 시작됐고 마음에도 없는 아픈 말들을 서로 내뱉다 결국 몇 년간 쌓아왔던 관계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함께 한 시간이 길수록, 또 나눈 추억이 많을수록 서운함과 허탈함도 커지는 모양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허전해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말은 또 다른 말을 낳는다. 굳이 상대가 있는 대화가 아니어도 그렇다. 독백이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색 등 말이나 글로 형상화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언어와 행동으로 표출되어 사상정립에서 관계 형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감당해낸다.
우리는 끊임없이 듣고 말하고 쓰고 또 읽는다. 그리하여 부지불식 간에 또 다른 말을 낳은 어떠한 말로 지금의 관계가 시작되고 존속되며 또 끝이 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말이 꼭 입을 통해 전해질 필요는 없다. 때때로 어떠한 행동은 말보다 더한 날카로움으로 상대나 상황을 정확히 표현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내성적인 그 누구라 해도 꼭 관계에서까지 소극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은 어떠한 방식이나 매체를 통해서든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말이다.
철학자 니체는 누군가에 의해 부여된 가치에 매여 있는 자들을 ‘노예’라고 정의했다. 가치나 사상의 뿌리가 일종의 ‘말’의 형상이니만큼,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대화도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정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사소한 말 나눔에도 더욱 신중해질 수 있다.
애석하게도 좋은 말이 꼭 좋은 말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치 노예와 같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말’에 임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던진 좋은 말의 가치를 알고 또 의미 있는 그 일에 힘쓴다면 더욱 자주 좋은 말의 선순환을 경험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인간관계를 집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집은 벽돌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쌓아 올린 그런 모양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물론 그 벽돌은 ‘말’이다.
벽돌을 하나하나 올려 지은 집에는 더 많은 시간과 공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후 오롯이 드러나고 마는 개개의 벽돌의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오늘 내뱉는 말 한마디에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더할 수밖에 없게 된다.
크고 작은 흠이 보이는가.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완성된 벽돌집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건 세월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멋스러움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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