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정 반대편, 리우에 울리는 애국가는 가슴속을 시원하고 또 뭉클하게 해 준다.
“저희 외조부님은 매일 아침 산책하셨어요. 그럴 땐 꼭 손자녀 중 한 아이의 손을 잡고 가시곤 했지요. 할아버님댁엔 늘 애들이 많으니까 같이 갈 아이들의 순서를 정해 놓으시고 순서 따라 손잡고 가셨지요. 애 중엔 늦잠자고 싶은 애도 있고, 걷고 싶지 않은 애도 있지만 나는 할아버지 손 잡고 걷는 것이 무척 좋았어요. 그래서 내 차례가 아니라도 혹 나오지 않는 애가 있을 것을 대비해 일찍 일어나 산책 준비하시는 할아버지 옆에서 지키곤 했지요. 당번인 애가 안가면 대신 가려고요.” 숙이 언니가 외조부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이 기다리면 둘 다 데리고 가시면 안되나요? 왜 꼭 하나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내가 물었다.
“할아버님은 규칙을 한번 정했으면 그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셨거든요. 별것 아닌 산책가는 순서도 한번 정했으면 그걸 따라야 한다는 것을 우리한테 어려서부터 심어 주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아무리 사소한 집안의 규칙이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것이 마땅하고 중요한 줄 알고 자라도록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옳고 그른 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또 길이 워낙 좁은 길이어서 겨우 둘이 손잡고 걸을 정도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저 같으면 같이 가고 싶은 아이들은 뒤에서 걸어도 좋고 앞서서 걸어도 좋고 다 데리고 갔을것 같은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님의 뜻이 더 있었던 것도 같아요. 걸을 때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내게만, 특별히 나만을 위한 대화를 하셨거든요. 그때 내가 만 다섯 살이었는데 할아버님은 내 나이에 맞춰, 내게 필요한 이야기를, 나만 위해 따로 생각하셔서 해 주셨던 거죠. 평생 엄청난 분량의 일을 하신 것만 봐도 헛되게 시간을 쓰시는 분이 아니셨어요. 내가 너무 어려 기억을 못 해 그렇지 그때 할아버님이 해 주신 이야길 써 놓을 수 만 있었더라면 모두 필요하고 좋은 말씀들이었을 거예요.”
“아, 그래서 그렇게 하셨구나!” 숙이 언니의 이야기가 이해된다. 손녀딸과 보내는 길지 않은 시간을 오죽 귀하고 소중하게 쓰고 싶으셨으랴?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도 그런 생각 하거늘. 항상 삶을 큰 축복이라고 여기며 사는 언니의 긍정적인 인생관도 그때 할아버지 손 잡고 걸으며 배우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지.
“가부장의 권위를 누리던 시대인데 할아버님은 혹 언니보다 손자 데리고 산책가길 더 원하진 않으셨나요? ”
“천만에! 할아버님께서는 일찍 외국 나가 공부하셨고, 또 기독교 사상을 깊이 간직하셨던 분이라 그런 차별은 조금도 없으셨어요. ”
“그 시절에요? 그러긴 쉽지 않으셨을 터인데….”
“그야말로 생각이 앞섰던 특수한 분이셨지요. 어느 날 그렇게 할아버님 손 잡고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할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지시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불러도 대답을 안 하세요. 겁이 덜컥 났지요. ‘큰일 났다, 빨리 어른들한테 알려야겠다’ 하고 죽을 힘을 다해 집으로 뛰어와 할아버지가 길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고 소리 질렀어요. 일하는 사람들은 나하고 같이 달려가 할아버지를 업어 모셔 오고, 의사 선생님도 급히 왕진 오셨어요. 할아버지가 깨어나시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다 날 칭찬해 줬지요. ‘너 아니면 큰일 날 뻔 했다’ 하면서요. 그래도 애석하게 그해 겨울 돌아가셨지만요.”
손잡고 걸으며 이야기 나누었을 할아버지와 외손녀. 크고 작은 둘의 정겨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뺄 수 없는 깊고 큰 획을 그어주신, 우리 애국가 가사를 지으신 분으로도 알려진 좌옹 윤치호 님과 외손녀 이야기다.
<
김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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