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싯궁싯하며 도무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던 더위가 시월의 문턱에서 꼬리를 내렸다. 바늘 끝 같던 햇살도 연해지고 스치는 바람은 탄산수처럼 시원하다. 기온이 조금 내려간 것 뿐인데 마음은 이미 서리와 매서운 바람을 떠올리게 된다. 가을 탓일까? 아마도 감나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편이 LA에서 묘목을 구해 심은 지 십오 년째인 단감나무는 이태째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차고 왼편에 서 있어 드나들며 자연히 눈길이 간다. 오월 어느 날 노란 별처럼 작은 꽃들이 피어난다. 유월 초가 되면 꽃진 자리에 아기 엄지발톱만 한 열매가 조랑조랑 매달리면 그 귀여움에 그냥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무더위에도 동글납작한 어린 감은 무럭무럭 자라고, 하루하루 더 단단해지며, 감잎의 한쪽 표면은 들기름을 바른 듯 윤이 난다. 더위 설핏해지는 구월이 오면 잎에도 열매에도 가을 색채가 슬쩍 스며들기 시작한다.
10월 말 감나무 가지는 진한 주황색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축축 늘어진다. 대지의 신, 자연의 신, 계절의 신, 풍요의 신을 다 불러 고맙다고 전하고 싶어진다. 대가 없이 받는 풍성함의 환희라 할까? 나도 충만함의 멋을 누리려 가을잔치에 참여한다. 가지를 꺾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도자기 그릇을 찾아 꽃꽂이도 해 본다. 남편은 곶감 만들 준비를 한다. 비바람을 견디고 내어준 소쿠리 가득한 감을 깎고 있는 허리 굽은 모습이 마치 자연에 대한 경건한 묵례 같다. 11월 말, 빈 겨울 하늘이 품어 익힌 까치밥도 사라지면 가지치기를 해 주고 다음 해 2월까지는 휴면에 들어간다.
매해 이런 풍경을 선사했던 감나무가 올해는 이상하다. 감나무는 두어 차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열매를 떨어뜨린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번 7월엔 간장 종지만 한 푸른 알맹이를 거의 모두 낙과(落果)시키고 일부만 매달고 있다. 일찍 시작된 불더위에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풋감 떨어뜨린 가지엔 열매꼭지 과병(果柄)만 매달고 있다. 주인 없는 꼭지에 바람이 머물고 햇살이 앉았다가 가지만, 초록색은 점점 누런색을 띠며 말라간다.
바람에 흔들리는 과병은 이별이라는 그림자를 담고 있다. 이별은 늘 조용히 다가오고 남겨진 자에게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내 마음속에서 친구 S의 기억을 불러냈다. 나와 달리 친구는 믿음이 좋아 일찌감치 권사가 되었다. 그는 이미 몇 해 전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삶을 대강 다시 추스를 무렵인 50대 초반에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소식을 듣고 찾아간 집엔 벽에도, 의자에도, 화장실 거울에도 온통 성경 말씀이 붙어있었다. 수술과 항암치료도 힘들었지만, 불안한 마음을 붙잡아줄 동아줄이 필요했으리라.
아직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남매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친구들이 거의 매일 모여 ‘아직 S는 데려갈 때가 아니다’라고 하나님께 떼를 썼다. 그러나 그녀는 일 년 남짓 고생만 하다가 동강 난 삶의 서사만 남기고 낮고 어두운 자리로 뚝 떨어졌다.
원래 인생에 답이 없다고, 조금 일찍 갔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때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인간의 삶도 시간과 자연의 흐름에 놓여있어 뒤를 돌아볼 틈도 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친구의 딸은 엄마가 남겨놓은 집에서 올망졸망 아이 셋을 기르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아름다움과 덧없음은 역설 같으나, 우주와 자연의 섭리로는 동전의 양면같이 한 몸이다. 나도 그랬지만 젊었을 땐 누구나 그저 열심히 산다. 조금 더 가지려고, 조금 더 높아지려고 애쓴다. 그러다 인생의 가을 언저리 어느 지점에서 어렴풋이 깨달음이 온다. 나뭇잎이 왜 떨어지는지, 부귀영화를 누리던 솔로몬이 왜 말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했는지. 어떤 작가는 왜 뼈를 깎아 평생 집필한 아까운 책을 태우라고 하는지. 나는 친구 S보다 운이 좋아 아직 감나무에 매달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복을 누리고 사는 셈이다.
오래전부터 지인들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다음은 내 차례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곤 한다. 내일 태풍이 올 수도, 모레 서리를 맞을 수도 있다. 아직 생명이 있으니 익어가는 중일까. 익어간다는 것은 나누고, 털어내고, 비워서 가벼워진다는 것일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지키는 자세일까?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는 말은 단지 시에서만 존재하지 않을까? 「10 월」이라는 시를 쓴 오세영 시인이 나에게 한마디 한다, “바보야 잃어 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거야!” 그렇다. 잃어가는 연습은 결국 오늘을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연습이기도 하다.
(중략)이 지상에 /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 낙과(落果)여, /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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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애 워싱턴문인회,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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