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그림 그리기 실력이 낙서의 수준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겨울밤만 되면 카드를 그렸다. 초등학생 시절이니 딱히 보낼 곳도 없는 처지에 적은 수요, 절대량의 공급, 정말 쓸데없는 짓으로 아까운 시간을 탕진한 셈이다.
왜 그랬을까. 지금 기억에도 밝은 그림은 없고 적막한 벌판의 눈 덮인 헛간, 나목(裸木)의 가지마다 핀 눈꽃, 지붕은 온통 눈에 눌린 통나무집, 누군가에게 꿈을 보낼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유난히 외로움을 타는 어린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카드에 대한 열의는, 30 중반 이민인생이 시작된 그 해 겨울 다시 도지고 말았다. 사용할 틈도 없는 벽난로 위에 줄줄이 빨랫줄을 매달고, 태평양을 넘어온 카드들을 널었다. 물론 보냈으니까 위문편지 답장처럼 보내온 것인데도 나를 잊은 것은 아니지, 다그쳐 확인하고 싶었다. 몇 줄 따뜻한 친필카드는 확실히 이민 초기의 절망에서 힘을 보태 주곤 했다.
해가 갈수록 내가 보내는 횟수가 적어지니 태평양을 넘어오는 카드 수는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타국을 함께 사는 이들의 카드가 대신 그 여백을 채워주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처음 다니던 직장에 리라는 백인 처녀가 있었다. 그녀의 집 벽면은 온통 책장, 책 속에 빠져 살다보니 이렇게 노처녀가 되었다고 그녀는 웃었다. 21년 전 필자가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둘 때쯤 그녀도 중부로 직장을 옮기면서 결혼, 지금은 대학생이 된 딸과 세 식구가 되었다. 그녀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카드에 안부와 가족사진을 보내오는데, 깜짝 놀라게 커 가는 그녀 딸의 모습에서 세월을 읽는다.
또 L형, 그는 출장이 잦아 일년 동안 두어번 교회에서 악수나 하는 처지인데도 그를 마음으로 가깝게 느끼는 것도 카드의 연이다. 다른 L형 부부, 주로 그 부인이 쓰는 카드 내용은 글에 대한 격려, 따로 만나는 일은 없지만 독립기념일이면 연례처럼 그 집에 초대받는 기쁨이 있다.
내가 먼저 보내리라 결심해도 언제나 선수 치시는 노인회의 K회장님, 붓글씨의 C박사, 글벗 K형, 너무 바쁜 분인데 언제 그랬을까 금문교 다리 꼭대기에서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만든 카드에 소중한 인연을 담은 글을 보낸 분. 필자의 졸문 집을 읽은 독자가 좋은 음악을 CD 에 담아 보내주어 12월의 밤을 따뜻하게 보냈다.
LA에서 S형의 전화가 왔다. 올해부터는 통신시대답게 전화로 카드 대신 하기로 선언합니다. 그래 참 좋은 아이디어다. 이심전심이랄까. 서울 사는 대학동창 S의 예쁜이메일 카드, L은 올해도 변함 없이 전화로 소식을 보내 왔다.
카드나 새해 전화는 한 줄의 사연이라도 나누지 않으면 못 배길 사이에서 주고받는 일종의 연서(戀書)다. 새해 아침 가게문을 열고 모처럼 개인 하늘을 바라 볼 때, 몇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새해 처음 받는 전화이기에 반갑고 콧등이 찡했다. 말과 말 사이에 이어지는 인연의 소중한 느낌, 문명의 이기로 새해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시대가 되었다.
새해 다음날, 아버지 대학동창 K회장님이 연하장을 보내셨다. 80이 넘어서시면서 작년에 암 수술을 하신 일, 납북되신 나의 아버지 추억, 나라 걱정, 아들 손자 이야기 그리고 끝으로 "자네가 서울 올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하겠는데 ! 더욱 건승하시라”
연하장은 대를 이은 우정의 확인이었다.
다양화 된 카드 보내기처럼, 올해는 형식을 뒤집어쓴 일상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 본질을 찾아내어 실속 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돌아보면 우리들은 뻔한 행사의 격식에 눌려 살아왔다. 서로 진실을 전달하는데 그 형식의 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카드나 연하장도 꼭 보내고 싶은 몇몇, 설령 답이 없어도 섭섭하지 않을 한두 명이면 족한 게 아닐까. 간단한 글의 카드나 연하장, 전화 한 통에도 정겨움이 담겨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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