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어머니를 두고 고향을 떠나온 지 몇십년- 해마다 이맘때면 꽁꽁 묶어 놓았던 효심이 발효되듯 눈물이 강을 이룬다. 어머니가 먼 하늘 나라로 가신지 8년째 접어든 이 봄. 어머니 몫인 빨간 카네이션 한 송이가 못내 전할 길 없어 가슴속에서 시들고 있다. 생전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찾아뵙기는커녕 전화 한번 제대로 못 드렸다. 아주 오래 오래 사실 것만 같아서 지금 이 아련한 마음이 있을 것을 상상도 못했다.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6.25 사변을 당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의 희생과 함께 홀로된 어머니는 5남매를 키우기 위해 혼신을 다하여 보릿고개를 수없이 넘겨야 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땅은 많았지만 남편 없이 홀로 건사하며 5남매의 학비를 조달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진학시험에 떨어지면 학교를 안 보낸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었다. 최선을 다해 악착같이 붙고 봐야 할 일이었다. 지금처럼 공부 해라해라 하는 식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하물며 붙기보다는 낙방하기를 기대했다는 농담을 하실 정도였다.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올 때 어머니는 걱정을 많이 하셨다. 이질감에 적응할 문제도 그랬고 유일하게 어머니 곁에서 가장 이해하던 딸 하나가 먼 이국으로 떠나간다는 사실은 삭히기 힘든 아픔이었을 것이다. “부디 몸조심하거라”라는 한마디 당부와 눈물 글썽이던 모습을 어찌 지울 수 있을까.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오던 어느 해 어머니를 이 곳으로 초청했다. 그때가 마침 어머니날이 끼어있던 5월이었다. 모처럼 6개월간의 모녀의 정에 살이 올랐는데 어머니는 아들들 걱정에 다시 서울을 향해 떠나가셨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더니 이렇게 자식이 많으면 걱정도 많게 마련이다.
그때 만남이 마지막이 되었다. 잘한 건 묻히고 잘못한 일만 생각난다더니 딱 잘했다고 내세울만한 것도 없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못한 일만 생각키울 줄은 미처 몰랐다. 자식된 도리를 못다 했음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나의 딸을 차에 태운 채 가끔 1번 도로 바닷가를 드라이브한다. 바다 표면에 비치는 엄마의 맑은 영혼을 보고 한의 응어리를 풀고 싶음이다.
영영 어머니의 그림자를 볼 수 없음에 눈물을 몰래 씻어 내리다가 딸에게 들키던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 때문이라는 걸 눈치챈 딸은 “엄마, 하늘 나라에 가면 외할머니 만날 수 있으니까 울지마” 했다. 그 말이 기특했으며 위로가 되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염려하시며 눈시울을 적시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이제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 돼버린 채 5월 가정의 달을 맞았다. 누구나 효도의 샘은 넘치는데 기회를 놓치고 후회를 한다. 부모님 생전에, 아니 지금 바로 “사랑을 드리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효심을 담고있는 한 송이 작은 카네이션이 시들지 않도록.
박 송 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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