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없던 시절, 시계가 흔치 않던 시절에 어머니의 시계는 산그림자였고 처마 그림자였으며 꽃과 새들이었다. 뒷뜰 감나무로 찾아오던 새들이 아침 잠을 깨워주었고 산밭에서 일어서야 할 시간을 저수지 속의 산그림자가 일러주었다. 곡식 널은 멍석 위로 옮겨 다니던 초가지붕의 그림자가 저녁 지을 시각을 알려 주었고 나팔꽃, 분꽃이 피고 지며 또한 어머니의 시간을 일러주었다.
우리집에 처음으로 생긴 시계는 동그란 괘종시계였다. 파리똥이 잔뜩 앉아 있기도 하던 그 시계가 생기고도 오랫동안 어머니는 습관처럼 그림자시계를 더 의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가 심심풀이로 어머니한테 시간을 물으면 그림자를 보시고는 3시 반 지났겄다, 5시 쪼금 못됐겠다, 하시면 그 시각은 정말 아주 조금씩 틀리긴 했어도 거의 정확했다.
시계를 보기 위해 안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내가 처음으로 시계를 향해 기다림을 배운 시각은 저녁 5시였다. “꽃과 같이 고옵고 나비같이 춤추며 아름답게 크는 우리, 무럭무럭 자라서 이 동산을 꾸미면 웃음의 꽃 피어나리” 음악이 나오고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정답게 인사 건네는 어린이방송이 시작되는 시각이었던 것이다. 고샅으로 저녁연기가 퍼지던 시각, 어쩌다 놀이에 팔려 방송시간을 놓치기라도 하면 어느집에서 틀어놓았는지 어김없이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와 동산의 내리막길을 줄달음질치게 했다. 뛰어오느라 이마에 배였던 땀이 오소소 식어가면 어머니가 내주시는 놋대야의 더운 물 속에 손과 발을 쏘옥 집어넣었다. 따뜻한 물 기운은 튼 손등을 지나 전신으로 퍼지고 바알간 귓볼을 타고 전해지던 어린이방송의 재미는 그 무렵 처음 먹어보았던 카스테라처럼 달콤했다.
거동이 불편해지셔서 아들의 아파트로 옮겨오신 어머니의 방에도 이젠 아주 큼지막한 전광시계가 걸려 있었다. 빨갛게 반짝거리는 글자가 너무 커서 섬뜩해 보이기까지 하는 시계였다. 시력이 약해지고 밤잠이 자꾸 깨져서 보시기에 편한 그런 시계를 준비하셨다고 한다. 이른 아침 잠이 깨져도 행여 자손들 잠을 방해할까봐 미동도 안하시고 심술궂은 요술장이처럼 시각을 퍼나르는 시계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시다고 하셨다.
물처럼 고여있을 어머니의 시간, 그 시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 복사꽃처럼 곱던 처녀시절이나 귀밑머리 수줍던 새색시 시절을 그리워하고 계실까. 그 산꽃같던 들꽃같던 어머니의 젊음 위로 지나가버린 세월의 그림자는 이제 자꾸 짙어져가고 있다.
수족이 불편해져버린 어머니의 방에는 소급되어지지 않는 어머니의 시간과 바꾼 열한명의 손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첫잠 깨지는 새벽이면 늘 그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넣어가며 기도를 하신다고 하셨다. 움직여지지 않는 수족에 대한 불평보다 누워서도 기도할 수 있는 맑은 정신이 있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일도 나의 핸드폰 알람시계는 높은 톤의 음악으로 나의 아침잠을 흔들어 깨울 것이다. 언제나처럼 나의 일상은 바쁠 것이고 저녁이면 돌아와 나란한 식구들의 신발 사이에 내 신발을 벗어두면서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다.
내 어머니의 그림자시계처럼 이제는 가고 없는 내 가슴 속의 다섯시는 아무리 간절하게 그리워해도 움직이지 않는 시계가 되어버렸다. 다만 퇴근 무렵 어쩌다 만나는 일몰의 어스름 속으로 불러보는 노래 “꽃과 같이 고옵고 나비같이 춤추며…” 공연히 서글퍼지는 그 짧은 음절의 기억만이 고장난 시계처럼 내 가슴에 걸려 있다. 그 노래를 흥얼거리다보면 고샅을 타고 오르던 저녁연기 같은 매캐한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른다. 그 놋대야 속의 더운 물 같던 어머니의 온기가 그리워진다. 삶의 한속을 느낄 때마다 생각나는 내 고장난 또 하나의 시계, 꽃 꺾던 산으로 나물 캐던 들로 다시는 걸음을 옮기실 수 없는 나의 어머니는 오늘은 또 무슨 생각으로 하루를 채우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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