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복(伏)도 지나가고 백로(白露)가 눈앞이다.
점점 생소해져가는 우리나라 고유의 언어 중 하나가 ‘서리’. 사전에는 무리지어 남이 지어놓은 농작물을 주인 허락 없이 몰래 훔쳐 먹는 나쁜 장난으로 나와 있다. 이사 올 때까지 살았던 곳은, 먼발치로 산이 보이고, 해변이 지척에 있던 곳.
그 당시 얼마나 오지였으면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여자인데도 십리 밖에 단 하나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러 갔다. 아직 어리다고 일 년 더 있다가 오면 반드시 입학시켜 주시겠다는 교장 선생님의 약속을 받고도 집에 와서 납득하지 못하고 계속 떼를 쓰는 외동딸의 학구열을 이기지 못하시고 도보 거리에 있는 서당에 다니게 해 주셨다. 장대 같은 총각들 틈에 끼어 최연소 홍일점인데도 며칠이나 다닐까, 아버님의 생각과는 달리 첫날에는 두고 떠나시는 아버님을 불안한 듯 힐끔힐끔 돌아보더니 둘째 날은 지필묵 혼자 챙겨가지고 가더니 얼굴 붉히고 아래만 내려다보다가 드디어 삼 일째부터 붓글씨도 잘 쓰고 하늘 천(天) 따 지(地)... 훈장님 따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천자문을 절반 떼었을 때 치르는 행사, 콩 볶고 막걸리 말로 받아 훈장님 대접하는 데 까지 하고 나서 서당 운영이 어려워졌는지 고개하나 너머에 있는 동네로 이사가게 되었다. 나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됐다. 그러나 서생 중 이모님을 사모하는 총각이 있어 그 등에 엎여 계속 서당에 다닐 수 있었다. 그 당시 서생들은 모두가 집에서 직접 면, 무명 등에서 실을 뽑아 베틀에 짜낸 직물, 천연의 수직물(手織物)로 손바느질한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그 총각은 추울 때, 두루마기로 나를 푹 씌워 덮고 다녔다. 나는 그 두루마기 사이로 답답하기도 하고 어디쯤 왔나 궁금하기도 하여 살짝 옷자락을 들어 올려 신선한 공기도 들이마시고 야산(野山)의 경관도 보곤 했다.
하루는 그 두루마기 사이로 ‘서리한 당근’을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겨우 흙만 떨어낸, 싱싱한 당근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순간 나는 어린 마음에도 남의 것 몰래 뽑아온 것 ‘먹어도 되나’ 잠깐 망설이다 아삭아삭하고 약간 달착지근한 당근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지내다 서당을 마치고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 1학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도회지로 이사했다. 이사하신 아버님은 경상남도 김해평야(金海平野) 물줄기 좋은 농토를 골라 작은 아버님께 주시고 농경을 하시게 했다.
여름방학이면 나는 농촌에 내려가 해질 무렵까지 논두렁에 앉아 수로(水路)를 바꾸려는 농부를 감시도 하고 갈대숲이 우거진 낙동강 줄기의 강물에서 개헤엄도 치고 발에 밟히는 조개를 발가락 사이에 끼워 들어올리기도 했다. 때로는 더러운 물을 마시기도 하고 귀에 들어간 물을 깨끗이 씻어 내지 못해 중이염에 걸려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치료 받기도 했다.
김해는 아버님의 고향 친척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아버님의 고모님 친손자가 나와 동갑이었다. 방학 때 내려가면 나를 가장 반기는 동갑내기 남종이. 시야 전체가 황금 물결치는 벼 농토, 그리고 당장 먹을 수 있는 수박, 오이, 참외, 옥수수, 고추, 감자, 가지 등 채소밭의 풍요로움. 그 채소밭에 우뚝 솟아있는 원두막에 나를 앉혀놓고 남종이는 크고 잘 익은 것만 골라 와서 먹으라고 했다. 연이나 밭일 하고 돌아오신 남종이 어머님, 간밤에 수박서리 참외서리 당했다고 ‘서리 서리’하시는 것 듣고 욕 하시는 줄 알고, 다음부터 따오지 말라고 해도 아주머니 밭에 나가시기 전 일찍 일어나 따와서 계속 먹으라고 주었다.
그 오지에서 초등학교에 입학, 학교에서 돌아올 때 먼 길이어서 툇마루에 올라서서 하얀 외길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까만 점하나, 개일까 사람일까 거리가 좁혀지면서 단발머리 까딱까딱 흔들며 다가오는 나를 반겨주시던 어머님...
당근 서리의 포근한 추억과 함께 콧잔등이 찡~한 옛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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