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가을 아침이다.
일찍 잠에서 깨어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조간신문을 들고 오다가 가을 찬 이슬에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린 다알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우아하게 피어 한여름의 정원을 한껏 자랑하던 녀석들이 어떻게 저렇게 쉽사리 생을 포기할 수 있을까? 어느 듯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나도 다알리아의 마지막 형상처럼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가겠지.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대충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 이것저것 시집을 펼치다가 문태준의 시[백년]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백년]을 감상하면서 문태준 시인은 관찰력과 상상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술집 시렁에 쌓인 베갯모에 수가 놓인 ‘百年’이라는 글씨에 시인의 시선이 머물렀다면, 문태준 시인은 천상 시인일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의 눈이라면 그냥 스쳐 지나거나 아예 관심도 없었을 일을 시인의 따뜻한 심상은 벌써 ‘百年’이라는 두 글자에서 시어를 발견하고 시인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독자와 함께 눈물 글썽이게 한다. 6행에 [연지처럼 붉은 실로…] 복숭아 꽃 수줍음처럼 붉은 연지 찍고 시집오는 새색시가 연상된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예쁜 내 각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하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하며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은 부부지만 어디 살다 보면 그렇게 되는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원수지간처럼 서로 할퀴고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마음속 깊이 생채기를 내는 부부도 많으리라. 내 아내, 내 남편을 남의 아내나 남의 남편과 비교하며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시키거나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남의 부부가 더 나을 것 같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내 것보다 더 못할 수도 있다. 지나친 욕심과 기대치 때문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서운한 것이다. “저 너무 영감 오늘 밤에라도 어느 귀신이 와서 잡아 가지 않나?”라고 저급하게 퍼부어 대던 어느 할머니의 진짜 속마음도 알고 보면, “수족을 쓰지 못하고 평생 아랫목에 누워 있어도 살아 있는 내 영감이 낫다”라고 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을 것 같다.
특히 우리 한국 부부는 결혼하고 자녀가 생기면 사랑이 전부 자식에게로 옮겨간다. 맛있는 음식도 내 남편이나 내 아내가 먹는 것보다 자식이 먹는 것이 더 흐뭇하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자식들을 버릇없는 아이로 키우거나 이기주의로 만드는 부모도 허다하다. 기러기 엄마, 아빠가 생겨나는 현대의 유행도 자식교육을 위해서라면 이별도 불사한다는 모티브가 바탕에 깔렸기 때문에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을까? 자식 농사 아무리 잘 지어도, 부부농사 잘못 지으면 다 헛된 농사가 된다. 늙은 부모 병상에 드러눕게 되면, 결국 자식들에겐 부담이지만, 물 한 그릇이라도 떠다 주고, 약 한 봉지라도 사주며 진심으로 위로해 줄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내 남편, 내 아내일 것이기 때문이다.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서 서럽게 술잔 기울이며 가만가만 울지 말고, 억 겁의 인연으로 만난 내 소중한 사람에게 건강할 때 잘하자.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백년]을 함께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부부가 같은 날, 함께 생을 마감하는 일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천년만년 함께 살 것 같지만, 한 치 앞도 우리는 예측 할 수 없으며 결국엔 홀로 떠나고 홀로 남는다. 문태준의 [백년]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이별의 아픔을 상기시키며 내 소중한 사람이 건강한 모습으로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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