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쯤 전에 산 무척 편해 보이는 타이맥스 시계, 그때 아마 20불 정도 지불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글씨보기 편하고 시간 잘 맞고, 스프링 쇠줄이 아침저녁 바쁜 직장 시간에 쉽게 차고 벗을 수 있으니, 이만하면 시계의 목적을 모두 이룬 셈이다. 그런데 며칠 전 이 시계가 더 이상 달리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 건전지를 갈아 꼈는데도 감감 무소식이다.
미국 사람들이 오래전 하던 말이 생각났다. 구닥다리 텔레비전 고장 나면 흔들어보고 또 발로 차보라고... 그러면 때로는 운 좋게 고쳐진다고... 그래서 흔들어 보다가 정말 책상에 대고 탕탕 쳐 보았는데도 소식이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시계를 버리지 못하고 오늘도 책상 위에 부상당한 상이군인처럼 올려두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을까. 그 사이 여러 시계가 있었는데 이건 왜 다른 것일까. 하기는 고장이 나도 옛날에 고장 났을 시계인데...
한국에서 수시로 아프던 내가 미국 오는 그날부터 아플 시간이 없어서 누구 말마따나 먹고 죽을 시간도 없다고 하더니 웬만큼 아파도 일 나가고, 그렇게 우리는 부지런히 달려왔다. 이 시계와 매일 살을 맞대고 지나와서 애착도 생겼겠지만 그 긴 세월 정신없이 달려온 내 모습과도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매일 내가 눈만 돌려 쳐다보면 늦지 말라고, 출근길 약속시간이 다 되어간다고 재촉하는 시계를 보며 나는 달리기 선수가 되지 않았던가. 그저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세월만 부지런히 헤아리며 묵묵히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나도 시계처럼 서버리기 전에 더 보람차게 살아야 할텐데...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주위를 돌아보니, 감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요즈음은 나이 탓인지 사계절의 변화가 부쩍 더 눈에 들어오고 자연의 신비함과 오묘함이 피부로 느껴짐은 웬일일까.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면 어미 새가 덤불을 만들고 둥지를 지어 어린 새끼들을 기르느라 혼신의 노력을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자식 기르느라 힘들고 고달픈 날들을 모두 참고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
정신없이 삶에 떠밀려 오다보니 어느 날 다 자란 새끼 새들은 나도 날 수 있다며, 어미 새를 두고 훌쩍 날아가 버린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서 새로운 거처로 옮겨갈 때 결혼이든, 직장이든 잘 가라고 손을 흔든 후, 집안에 들어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아이의 방문을 들여다보면 새삼 방안이 휑하니 빈 것 같은 상실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듯 눈물까지 울컥 솟기도 한다. 그래도 무사히 탈 없이 자라 준 것이 너무 고마울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허전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니 서운해도 따르는 것이 순리이리라.
가까운 친구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아이들만 독립 하라는 법 있나. 아이들이 독립을 했으면 우리 부모들도 정신적 독립을 해야만 해. 아니, 완전히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집착을 줄이고 이제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 못한 것들 모두 하면서 남은 인생에 더 집중하라는 말이지.” 친구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아이들한테 너무 자주 전화하면 때로는 귀찮아하니까, 귀찮은 존재가 절대 되어서 안 된다고. 전화도 너무 자주 하지 말고. 우리가 아이들 눈치를 봐야하는 시기가 온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길을 찾아 나름대로의 삶을 알아서 잘 갈테니 걱정 하지 말라”면서 “요즘 신세대들은 우리 부모세대보다 훨씬 스마트해서 판단도 더 잘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식들이 모두 떠난 빈 둥지를 지키는 부모님들이여, 오랜 세월 자나 깨나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며 수없이 하던 아침저녁 자식걱정 이제는 내려놓고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하시라. 자식들이 무얼 묻거든 어설프게 대답해서 본전도 못 찾으면 안 되니 웬만한 대답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로 끝내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그리고 자녀들이 바른 판단으로 자신들의 앞길을 개척해나가길 빌면서 뒤에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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