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면.성실로 미국사회에서 인정받은 상권”
각종 인종 불이익 최소화하기 위해 단체 필요성 절감
75년 청과, 78년 수산인협 각각 창립...부지런한 한인상 정착
마피아 찬치던 풀턴어시장서 단체행동으로 맞서 입지 강화
70년대 중반 뉴욕에 갖 이민온 한인들 가운데 사업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창업자금 덜 들고 몸으로 때울수 있는 사업을 찾다 보니 주로 청과업이나 수산업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수소문해서 찾은 곳이 헌츠포인트 청과시장과 풀턴 어시장. 경험 없고 언어 딸리는 이국에서 한인들 끼리 몇사람만 모여도 바로 친근해지기 마련이고 어느집에 어떤 물건이 싸고 잘 팔리더라는 정보교환 차원에서 매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시장바닥은 언제나 살벌했고 범죄의 온상이 됐던고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같은 처지에 떨어진 사람끼리 똘똘 뭉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긴것이 협회였다. 협회 창립시기는 회원이 많고 사고를 많이 당했던 청과협회가 75년에 먼저 창립됐고 수산인협회는 78년에 창립됐다. 이 두 협회는 이민초기에 설립된 직능단체의 효시로서 뉴욕 한인사회의 발전과 함께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현존 단체들이다.
■ 뉴욕한인 청과협회
초창기 헌츠포인트에 모이던 청과상들은 도매상들로 부터 괄세를 많이 받았다. 같은 물건도 좋은 것은 미국인 도매상, 수퍼마켓 바이어들 한테 팔고 한인들에게는 B급을 주고 값은 A급을 받았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고 경험이 부족하니까 때로 인종적인 차별도 당했다. 처음 그들이 물건 사러 시장을 찾았을때 도매상들은 대꾸도 안했다. 쳐다보지도 않았고 멸시를 당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거기다 크레딧이 없으니까 현금거래를 주로 했다. 캐시를 지니고 다니니까 강도들의 좋은 표적이 됐다. 총, 칼로 위협당하고 돈 빼았기는 과정에서 반항하다 총에 맞고 칼에 찔리는 사고들이 많았다. 차에서 내리면 지켜서 있다가 권총으로 위협해 트럭 안으로 끌고 들어가거나 화장실에서 현금을 강탈하곤 했다. 그렇게 여러차례 당하다 보니까 자체 방어수단으로 야구 방망이로 무장을 하거나 총을 갖고 다니는 한인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상매들로 부터 당하는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데 뭉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들이 생겨 협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어려운 이민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한 생존의 방책으로 뉴욕한인 청과상조회를 출범시킨 것이었다.
1975년 10월11일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할 당시 액티브한 초창기 멤버들 가운데에는 김원준, 장순영, 조병식, 이성종, 허련, 장영식, 손영탁, 홍현칠, 이일룡, 송모등이 있었고 초대회장에 전홍규를 선출했다. 이들은 단합된 힘으로 경찰서를 찾아가 교섭끝에 시장내에 경찰관을 상주시키는 방범대책을 이끌어냈다. 또한 회원간 이슈로 등장한 좌대 4피트 이상 합법 연장 입법안
을 추진하기 위해 뉴욕시청에 끈질긴 교섭과 로비끝에 이를 성사시키는등 협회내 봉사실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유급직원을 상주시켰다.
초창기 청과업자들은 주로 유태인들이나 이태리인들이 경영하던 야채가게를 인수받아 그들보다 몇배의 노력으로 신선한 야채를 공급하면서 주7일 24시간 영업으로 상가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후로 급격히 늘어난 청과상들은 근면성을 떨치면서 뉴욕시의 명물로 등장했다. 그가운데 성공을 거둔 상인들은 매스컴에 오르기도 했다. 70년대 중반 미국 정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코리아 게이트 사건과 맞물려 KCIA나 통일교 자금으로 야채가게를 차린다는 엉뚱한 루머에 휘말린 적도 있었다. 1982년 8월 뉴욕 데일리뉴스의 그와같은 보도로 인해 직접 피해를 입은 회원들이 신문사로 몰려가 시위를 벌인 끝에 사과를 얻어낸 일도 있었다.
78 년 청과상조회 2대 이성종 회장이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되면서 동포사회의 판도를 바꿔놓는 몇가지 역할을 했다. 그때까지 유학생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뉴욕한인회의 물줄기를 새로 이민온 비지니스 그룹에게 돌려놓는 변화를 주도했다. 협회 창립 불과 4년만에 7-8백명을 헤아리는 막강한 조직을 바탕으로 한인사회 판도를 바꾸던 때였다. 때마침 두갈래로 갈라졌던 뉴욕 한인사회를 통합하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뉴욕한인회와 뉴욕한인연합회로 양분되었던 커뮤니티를 이성종 회장이 당선되면서 한인회로 흡수, 단일화시킴으로서 동포사회의 단합을 꾀했다. 이후로 협회는 두명의 또다른 뉴욕한인회장을 배출했다. 6대 강익조 회장이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되어 회관을 마련하면서 연임 기록을 세웠고 이세목 전 뉴욕한인회장도 청과협회 출신이다.
82년 청과상조회에 의해 창설된 추석맞이 대잔치는 해를 거듭할수록 범동포적인 행사로 자리를 굳게 잡았고 한때 가을이 되면 협회가 한인사회를 위한 대규모 김장시장을 운영해 환영을 받았으나 아쉽게 중단된 일도 있었다. 한때 운송협회와 분리된 적도 있었으나 통합된 청과협회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뉴욕한인 수산인협회
70년대 중반부터 뉴욕일원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동포상인 40여명이 친목과 정보교환 차원에서 소규모 모임을 갖다가 78년 1월3일 창립총회를 갖고 뉴욕지구 어물상인회로 발족시켰다. 초대회장에 김상문씨가 선출됐으나 급서하는 바람에 회원들간에 서로 돕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78년 박승두 회원이 풀턴 어시장에서 강도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어 이녹우 회원이 도매상 세일즈맨과 다투다 뇌진탕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회원 점포에 화재가 발생하고 회원 가족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등 불상사가 잇따랐을때 협회가 나서 상부상조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당시 수산인들과 청과상등 한인상인들은 미국사회로 부터 근면성을 인정받아 부지런한 한인들이 뉴욕시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83년 협회는 뉴욕한인수산인협회로 명칭을 바꿨다.
초창기 수산인들은 마피아 조직이 판치던 풀턴어시장에서 새벽시장을 보면서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한 사례가 많았다. 마피아와 연관을 가진 도매상들이 중량미달, 물건 바꿔치기, 배달사고등 심지어 폭력을 수반한 인종편견적인 행동도 불사하던 시절 협회가 앞장서 단체행동으로 맞선 적도 있었다. 그럴수록 협회를 중심으로 결속이 잘 되었다. 80년대 중반에는 뉴욕시에 탄원서를 내고 시위를 벌이며 정면대결을 벌인 끝에 한인들을 무시하거나 불이익을 준 도매상으로 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한편 시장내에서 한인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때 역할을 주도했던 신만우 회장은 후에 뉴욕한인회장이 되었다.
때마침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의 취임과 더불어 대대적인 마피아 소탕작전이 펼쳐져 뉴욕시와 협회 관계도 호전되었고 도매상들과의 상거래 질서도 잡혀나갔다. 그러다가 2005년 11월11일 풀턴 어시장 시대가 막을 내리고 헌츠포인트 시대로 진입하는 변화가 이루어졌다. 어려운 초기 이민시기를 함께 견뎌온 수산인협회와 청과협회는 때로 야유회를 공동주최 하는등 협회간 유대를 꾀하다가 결국은 헌츠포인트 도매시장을 함께 이용하는 직능단체가 되었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청과협회 출신 이성종 한인회장

강익조 한인회장
.jpg)
이세목 한인회장

수산인협회 출신 신만우 한인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