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일 새벽이었다. 벌떡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혹시 그 곳에?” 번득이는 어떤 생각이 나의 잠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버리지 말고 가만 놔 두어라. 언젠가는 쓸 날이 있을 거야.” 어머니 생전에 하시던 말씀이 머릿속에서 맴 돌면서 혼자 속으로 고민하던 문제를 푸는 한 가닥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거실로 나가서 장롱을 뒤지기 시작했다. 옛날 한국 장롱인데 장식품으로 진열 해놓았을 뿐 쓸 만한 물건을 넣어두지 않아서 평시에는 거의 열어 보지도 않았었다.
날이 밝으면 손자 손녀들이 세배를 하러 올 텐데 입힐 한복이 모자라 어떻게 할까 하고 밤새 고민을 했어도 묘안이 없었다. 부쩍 자라는 아이들이 6명으로 늘어나기도 했지만 입힐 만한 적당한 한복이 없었다. 유난히 한복을 좋아하는 큰 손녀는 아직 아홉 살인데 키가 할머니를 따라 잡을 것처럼 훌쩍 커 버렸다. 자기가 입을 한복이 없다고 울먹일 손녀의 모습이 아롱거려 마음이 아파서 잠을 못 이루었던 것이다.
설날 구차한 설명을 아이들에게 해야 한다. 날이 밝아 오는 것이 두려워졌다.
우리 어린 시절, 새해에 새날이 밝으면 어머니들은 집안 식구들에게 새로운 옷을 입히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바느질을 하셨다. 한 해가 기우는 때면 집집마다 새 옷을 장만하느라 분주했다. 은은하게 불이 밝혀진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다듬이 방망이 소리가 서로 어울려 추운 겨울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며 밤하늘의 달과 총총히 빛나는 별들과 함께 펼쳐지는 아름다운 교향곡이었다. 어린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날들이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이 밤을 가슴만 태우고 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한복 만드는 법을 배워 두었어야 했어!” 중얼 거리며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장롱 속에 있는 물건들을 다 퍼냈다. 그런데 제일 밑바닥에서 손에 잡히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청색 보자기?” 나는 중얼거렸다. ‘무엇인가?” 전혀 기억에 없는 물건이었다. 그 보자기 속에 30여 년 전 어머님이 마련해주신 우리 아이들에게 입혔던 한복이 그대로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더 놀란 것은 내가 어린 시절 입었던 색동저고리가 그대로 있었다.
‘나의 색동저고리’ 감회가 깊었다. 아홉 가지 영롱한 색의 명주 천을 하나하나 곱게 이어 색동을 만들고 그 위에 금 도장으로 예쁘게 꽃무늬를 찍고 저고리 앞 끝에는 빨간 명주 실로 방울을 만들어 달아 놓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옷, 아녀자들이 잔뜩 멋을 부린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었다. 6.25 한국 전쟁 후 잿더미가 된 서울의 거리, 남대문 앞 광장에서 색동저고리 치마를 입고 함박꽃처럼 활짝 웃고 있던 소녀의 사진이 떠 올랐다. 바로 그 옷이었다.
미국에 와서 몇 십 년 동안 살면서 거의 한국을 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한국의 전통을 다시 찾으려고 잠을 설치며 일어나서 옛날 장롱을 뒤지게 된 것은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미국 사위와 며느리들 때문이다.
몇 년 전 막내 며느리를 보게 되었던 때의 일이다. 며느리가 될 미국 아이가 자기는 한국식 결혼식도 하고 싶다고 했다. 조금 당황했지만 그 핑계로 식구들이 한복을 해 입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결혼 며칠 전에 자기에게도 ‘박스’를 보내줄 것이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했다가 나중에야 함을 보내 달라는 말인 것을 알아 차렸다.
결혼 전날이었다. 풋볼 팀에서 아들과 같이 뛰었던 덩치가 큰 친구가 그 함을 들고 신부 집에 가서 그 주위를 돌며 “이 함을 살 사람은 돈을 가지고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오늘은 설날 아침! 색동옷, 어린 시절처럼 품에 꼭 안아 보았다.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빨간 댕기를 펄럭이며 하늘 높이 널을 뛰어보고 싶다. 색동옷을 입었던 그 소녀는 비록 폐허가 되어버린 허허 벌판에 서있었지만 아롱다롱 무지개 꿈을 꾸었는데 우리 손녀도 함박꽃처럼 활짝 웃으며 아름다운 색동 꿈을 꾸겠지! 곱게 다리미질을 하며 새 아침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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