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고향집에 서울에서 친척들이 몰려와 고요하던 우리 집이 갑자기 방마다 친척 식구들로 만원 사례였을 때 일이다.
큰아버지, 큰엄마, 조카들, 시누이들 그들의 아들딸들과 함께 하는 식사시간이 즐거운 축제 시간으로 밥맛이 너무 있어 열심히 밥을 많이 짓는 데도 모자랐다.
시아버지의 병환이 위암이란 진단을 받아 쇠약해지시니 돌아가시기 전에 뵈올려고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모였다. 할아버지는 병환으로 통 식사를 거르고 누워계시는 데 병문안 온 손자 손녀들은 저희끼리도 모처럼 만났으니 신바람 나 갑절로 먹어대고 마치 잔칫집 같이 북적댔다.
“이봐 그릇에 밥을 풀때 미리 당신 밥부터 퍼서 제켜 놓고 그 다음에 손님들 밥 퍼요”
내 밥이 없어 식구들 밥 먹는 동안 살짝 쉬고 있는 데, 남편이 밥 먹다가 보니 내가 없으니 나를 찾아 우리 방에 왔다.
내 귀에 일러주는 남편 말이 진담으로 들리지는 않으나 나를 생각해주는 한사람 있음이 위로가 되었다. 밥을 그릇에 푸다보니 내 밥이 없어, 그냥 누룽지 물밥으로 때울 때가 있었고 남편 외에는 아무도 혹시 밥이 모자라지 않느냐고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같이 매 식사가 쉽지 않았고 전쟁 직후라 먹을 것이 귀한 때였다. “방에 상 드려 놓기 전에 생선도 가운데 토막, 당신 것 제켜 놓아요. 안 그러면 당신 굶어요 굶어!” 그 이야기를 어느 날 친정 엄마에게 했더니, “쯧쯧 버릇없네. 자기 먹을 거 먼저 챙겨 놓는 주부가 어디있노. 그러면 못써.” 고요한 엄마의 말이 딸의 시집살이가 걱정스럽든 차에 사위의 그 소식이 차라리 좀 안심이 되는지 다시는 그 일로는 말이 없었다.
누가 나를 고된 시집살이 시키는 사람 없는 데도 무작정 조심스럽고 누룽지 먹는 서러움은 마치 외지에 와 외톨이로 떨고 있는 내게 남편의 한마디가 안 먹어도 힘이 되어 주었다.
내가 시집오니 고향에서 데려 온 열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부엌에서 나를 도왔다. “당신도 방에 들어와요.” 남편은 연이와 같이 부엌에서 밥 먹는 나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지 방에 들어와 밥 먹으라고 부지런히 불렀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 온 후 부엌에 수돗물이 나오고 만사가 편리해졌다. 하지만 서울의 겨울은 삼한사온의 시베리아 추위로, 부엌 안에 있는 수돗물 꼭지가 꽁꽁 얼어붙는다.
그 때는 19공탄 하나로 밥 짓고 국 끓이고 내 손은 빨갛게 얼어 감각이 없었다.
아이들 학교 갈 준비에 바쁘게 돌아가는 데, 누가 내 발 뒤꿈치를 툭 툭 치며 다리를 들어 올리라는 시늉을 한다. 반사적으로 한쪽 다리를 드니 남편이 어디서 구했는지 담요 쪼가리를 발밑에 깔아주고 부엌을 나간다. 손발이 꽁꽁 얼다가 발바닥이 따듯해 졌다.
내가 봄이 오니 좋다 하면, 남편은 가을이 좋다 한다. 가끔 남편 말에 절반 이상이 농담이 섞여 있어, 어느 것이 진담이고 어느 것이 농담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낙엽은 떨어지고 으시시 춥고, 김장해야 되고, 연탄 준비해야 하고, 가을 좋은 게 뭐가 있느냐고 하자, “찬바람이 불어야 살맛이 나지. 축 늘어졌다가 벌떡 일어나는 계절이지.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야 햇곡식이 나오고, 과일도 가을이 와야 잘 익어서 달고 먹게 되지. 가을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계절이야.” 그 말 들으니 일리가 있어 보였다.
내가 직장에서 일할 때였다. 어느 날 남편에게 “여보, 내 옆에 있는 미스 김 말이에요. 매일 미스 김 퇴근 시간쯤 되면 그 남편이 와서 바깥 대합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미스 김 일 끝나고 나가면 둘이 같이 집에 가는데 자기 부인을 굉장히 사랑하나 봐요” 하자, “뭐라구? 사람을 어떻게 보고하는 말이야. 나보다 마누라 더 사랑하는 자 있으면 내 오른 편에 나와 보라고 해. 누가 마누라 더 사랑하는지 해보자구” 고래고래 사랑을 고백한다.
가끔 생활이 짜증스럽고 대화가 답답할 때 꽁꽁 얼은 내 발 밑에 담요 쪼가리 깔아주고 돌아서 나가든 남편 뒷모습이 지금도 내게 따듯한 온기 되어 물같이 나를 녹게 한다. 오랫동안 남는 남편 사랑의 추억은 이렇게 작지만 따스한 그런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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