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가고 있다. 2000년 10월 어느 날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이삿짐 박스에 넣고는 까맣게 잊어 버렸던 벽시계. 차고 한구석에 10년이 되도록 뽀오얀 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있던 박스.
대대적으로 차고 정리하던 남편이 버린다고 밖에 내다놨다가 혹시나 해서 하마터면 쓰레기 차에 실릴 뻔했던 찰라, 찬찬한 남편의 아이디어로 구출(?)되어 어두컴컴한 차고 구석에서 벗어나 환한 리빙룸 정면벽에 걸리는 영광(?)을 누리고 있으니 복을 타고 난 벽시계가 아닌가.
멈추었던 벽시계는 째깍 째깍 아무 이상 없이 정상으로 초침을 돌리며 흑백 필름처럼 아득한 추억의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보름에 한번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는 아주 옛날 구식 벽시계다. 태엽을 감아주면 종치는 소리가 빠르고 태엽을 다시 감아주어야 할 시점에 되면 종치는 소리가 느릿느릿 마치 새끼 밴 암소의 걸음걸이와도 같다.
벽시계는 10년이란 긴 세월을 박스 안에서 생명이 멈추었지만 오늘 의젓한 벽시계 초침 소리는 귀에 익숙한 정겨움을 안겨준다. 20년 전 큰 시누이가 이민 오면서 선물로 가져 온 벽시계. 그 땐 끔찍이도 아끼던 물건이었는데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벽시계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 갑자기 시누이 부부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한결같이 성실하게 사시는 분. 젊은 시절 초등학교 선생으로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발안’이란 시골 마을 벽촌에 들어가 문맹 퇴치로 앞장서 헌신적인 열정을 다한 교사부부였다.
벽지 농촌 어린 아이들을 위한 모범적인 교육열이 널리 알려지며 문교부에서 주최한 상록수상에 오른 수상자 부부였으며, KBS TV 방송국 드라마 “벽촌에서 꽃피운 상록수 부부(1970년)”에 출연했던 주인공들이다.
세월의 흐름 속 어느 날, 서울에 있는 학교로 발령을 받고 몇 달이 지났을 때 7살 된 아들이 맹장 수술을 받던 중 병원의 실수로 그만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천국에 갔다. 생떼 같은 아들을 잃고 폐인이 되다시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할 때 환경을 바꿔보라는 주위의 성화에 고민하다 이민길에 올랐다.
이민 초기 한동안은 쉬면서 관망을 했지만 마땅한 기술도 없고 마냥 놀 수만 없는 이민자의 삶이기에 친지의 소개로 잡화상을 견학, 견습한 후 가게를 계약 인수했다.
밤낮없이 구색을 맞추느라 물건을 사다 진열하고 계산대에서 달러를 받고 거슬러주는 힘든 노동 속에 발이 통통부어 쩔쩔매던 이민 생활 10년 세월의 어느 날, 무장 강도가 침입했다. 시커먼 복면을 쓰고, 흉기에 휘말리어 쓰러지자 구둣발로 목을 짓누른 살인적인 잔인함 속에서도 돈은 털렸지만 다행히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그 끔찍한 상황을 겪고 보니 꿈에도 생시에도 떨쳐버리기가 힘들고 만정(萬情)이 떨어져 미국생활을 접고 역이민을 하고 말았다. LA의 새로 조성된 동네의 아담한 새집에서 펼쳐 보려던 꿈과 10년의 미국 생활에서 힘든 고비고비의 세월을 붙들지 못함은 안타까움이요, 붙들 수 없는 현실은 슬픔이었다는 시누이 부부.
퇴잔병(?)으로 돌아간 고국이 조금은 낯설었지만 다행이도 초등학교 교사 자리를 얻고 선생이 천직임에 감사 생활하다 은퇴를 맞았다. 부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운동으로 정신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볼룸 댄스를 접하면서 유쾌한 취미생활로 이어가며 클럽회원이 되기도 했다. 볼룸 댄스 경연대회 경합이 있는 날 운 좋게 대상으로 뽑히는 행운 속에 유럽 여행권을 받고 늘 꿈꾸던 유럽여행 추억을 간직했다는 만년의 삶.
주인에게 완전 외면당한 채, 감금(?) 10년의 세월을 확실히 털고 초침과 시침을 정확히 맞추며 해방의 기쁨을 알리듯 ‘땡~앵,’ ‘땡~앵’ 큰 소리치는 신통한 벽시계.
눈에 확 들어오는 투박한 벽시계를 바라보며 잊고 지냈던 시누이의 정(情)을 그리며 쉼 없는 사랑의 시계초침 속에서 늘 평안한 노년의 삶으로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유설자
워싱턴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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